제목#1 |
돌 던지며 전쟁하는 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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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1 |
돌싸움 또는 석전놀이는 고대로부터 무예의 한 부분이었고, 민간에서는 단오 때 즐겨하던 놀이였습니다. 고려 때는 ‘석투군(石投軍)’이 있었고 돌싸움은 군사적으로 유용했습니다. 조선 태조는 돌싸움에 능한 사람들로 ‘척석군(擲石軍)’을 만들었고, 이 부대는 왜구를 잡기 위해 배를 타고 출병하기도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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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2 |
태종의 석전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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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2 |
조선을 개국한 태조는 자주 석전을 열었고, 민간에서도 단오날이 되면 돌싸움을 벌였습니다. 돌싸움은 위험한 놀이여서 사상자가 문제가 커졌습니다. 태종은 이를 금하고 돌싸움 하던 사람들을 잡아넣었습니다. 그러나 석전은 끊이지 않았습니다. 청계천 광통교에서 벌어지던 석전에 뛰어들었던 무관이 돌에 맞아 죽는 일까지 벌어졌습니다. 석전을 금지한 태종도 석전을 좋아하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1421년 상왕시절, 이질을 앓고 있었는데도 석전을 보고 싶었는데, 신하들이 말리자 석전은 내가 즐기는 것이니, 보고 나면 병이 나을지 어찌 알겠는가라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태종이 승하하자, 세종은 척석군을 폐지하고 민간에서도 엄격히 금했지만, 돌싸움은 끊이지 않았습니다. 양녕대군이 이복형제들과 돌 던지기에 능한 20여명을 모아 석전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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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3 |
도성안 사람들이 이기면 풍년, 도성밖 사람들이 이기면 경기도만 풍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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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3 |
민간에서는 아현과 삼문 밖 사람들의 돌싸움이 유명했습니다. 삼문 밖과 아현 사람들이 떼를 이루어 편을 가른 다음 몽둥이를 들고, 혹은 돌을 던지고 고함을 치면서 달려들어 접전한다. … 삼문 밖 편이 이기면 경기도 안에 풍년이 들고, 아현 편이 이기면 다른 도들에 풍년이 든다고 하여 많은 사람들이 아현동 편을 들었다고 합니다. 조선 말 선교사 헐버트는 “한국인들이 중용적이고 남에게 해를 끼치는 짓을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본다면 이 놀이는 좀 변칙적이다.”고 했으니, 외국인의 시각으로 본 한국인들은 평화를 사랑하는 마음과 호전적인 면이 공존하는 민족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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