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보 상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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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정보 | JGS_000124 / 고산자교 | ||
* 명칭 | 고산자교 | 이명칭 | |
개요 | 대동여지도를 만든 김정호의 호, 고산자 |
본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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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1 | 고산자교 | ||
내용#1 | 청계천 복원으로 만들어진 다리 중에서 가장 마지막에 있는 다리가 고산자교입니다. 고산자교을 두고 남북으로 뻗어있는 도로가 고산자로입니다. 조선 후기 지리학자인 김정호(金正浩)의 호가 ‘고산자’입니다. | ||
제목#2 | 대동여지도 | ||
내용#2 | 김정호는 조선시대 가장 많은 지도와 지리지를 편찬하였습니다. 그 중 그를 유명하게 만든 것은 목판 ‘대동여지도’입니다. 제작에만 30년이 걸렸고 함경북도에서 제주도까지 22개의 첩에 담아낸 대동여지도는 접으면 책이고, 펼치면 가로 3.8m, 세로 6.7m의 한반도 지도가 됩니다. 지도에는 도로와 산, 강, 성곽, 역참, 창고, 봉수 등의 다양한 내용을 간략한 부호로 표현했습니다. 도로는 10리마다 간격을 표시하는 축척으로 거리를 파악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의 지도와 거의 일치할 만큼 정확합니다. | ||
제목#3 | 지도제작의 배경 | ||
내용#3 |
낮은 신분에 불과한 김정호는 어떻게 국가기관이나 소장하고 있는 수많은 지도와 지리지를 접하여 공부하였으며, 조선에서 가장 많은 지도와 지리지를 만들 수 있었을까요? 먼저 그에게는 든든한 후원자들이 있었습니다. 김정호의 청구도 서문을 보면, 최한기는 신분이 낮은 김정호를 “나의 벗”으로 칭하고 있습니다. 최한기는 막강한 부자 집안이었고, 수많은 장서를 보유한 학자로서 학문적 경제적으로 김정호의 후원자였습니다. 신헌은 조선26대왕 고종 때 지금의 국방부장관인 병조판서를 지낸 무관입니다. 그는 정부기관에 있는 수많은 지도를 김정호에게 주고 ‘대동방여도’를 만들게 했습니다. 조선후기 상업의 발달도 큰 몫을 했습니다. 전국을 다니며 장사를 하는 상인들은 전국을 권역별로 상세히 파악할 수 있는 지도가 필요했습니다. 접을 수 있어서 휴대가 편한 대동여지도는 안성맞춤이었습니다. 게다가 대동여지도는 대량 보급이 가능한 목판 지도였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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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4 | 지도에 미친 사람, 김정호 | ||
내용#4 | 가장 중요한 것은 김정호 자신이었습니다. 김정호는 젊어서부터 지도학에 미쳐서 지도를 수집하고 공부했으며, 그림과 목각 기술이 뛰어났다고 전합니다. 지도에 대한 그의 집념이 조선의 역대 지도와 지리학을 집대성한 대동여지도를 만들게 한 것입니다. 그러나 조선이 낳은 위대한 지리학자의 삶과 족적에 대한 변변한 기록이 없습니다. 그가 어디 살았는지 조차도 확실하지가 않습니다. 그가 낮은 신분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에 와서 지도와 함께 했던 김정호의 삶을 기념하기 위해 고산자교를 세웠습니다. |
상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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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분류 | |||
주제분류 | |||
연계비콘 | |||
지번주소 | |||
도로명주소 | 서울특별시 동대문구/성동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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