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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상세
관리정보 JGS_000121 / 비우당교
* 명칭 비우당교 이명칭
개요 청렴한 삶의 대명사 비우당, 겨우 비나 피할만한 집

본문 정보
제목#1 비우당교
내용#1 비우당교에서 청계천 북쪽으로 뻗어있는 길이 지봉로(芝峰路)입니다. 한국 최초의 백과사전 지봉유설(芝峯類說)을 쓴 이수광의 호가 지봉입니다. 지봉로를 따라서 40분쯤 걸어서 올라가면 ‘비우당’이라는 조그마한 초가집이 나옵니다. 이곳이 이수광이 지봉유설을 저술한 곳입니다.
제목#2 비새는 우산각의 재상 유관(柳寬)
내용#2 비우당 자리는 본래 세종 때 재상을 지낸 유관(柳寬)이 살았던 곳입니다. 하정집(夏亭集)에 의하면, 유관은 봉급을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사용했기 때문에 자신의 초가집은 제대로 손보지 못했습니다. 비가 많이 내리던 어느 날, 방안으로 비가 새자 유관은 과거 급제 때 받은 우산을 쓰고 비를 피하면서 아내에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우산이라도 있어 다행인데, 우산도 없는 집은 이 비를 어찌 피할까’라고 하면서 오히려 우산 없는 이웃을 걱정했습니다. 그 뒤로 사람들은 유관의 청렴함을 칭송하여, 이 집을 우산각(雨傘閣)이라고 했습니다.
제목#3 유관의 외손 이희검
내용#3 유관의 4대 외손 이희검은 왕족출신으로 선조 때 판서까지 지냈습니다. 그는 유관의 청빈한 삶을 이어 받아 우산각이 있었던 자리에 초가집을 짓고 살았습니다. 하루는 손님이 찾아와서 ‘공(公)이 살기엔 집이 너무 초라하고 누추하지 않습니까?’라고 묻자, ‘이것도 우산에 비하면 사치지요.’라고 했다고 합니다. 우산각은 1592년 임진왜란 때 집이 모두 불타서 없어지고 주춧돌만 남게 됩니다.
이희검의 아들이 바로 이수광입니다. 이수광 또한 이곳에 초가집을 다시 짓고 ‘겨우 비나 피할만한 집’이라는 뜻으로 ‘비우당’이라 불렀습니다.
제목#4 비우당에 은거한 이수광
내용#4 1613년 광해군 5년에 명문가의 서자 일곱 명이 살인을 하고 돈을 강탈한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광해군의 심복은 이 사건을 역모사건으로 만들었습니다. 조작된 역모사건으로 수십 명의 신하가 연루되어 죽었습니다. 집권 대북파는 인목대비의 9살 아들 영창대군과 인목대비의 아버지 김제남과 그의 세 아들마저 죽였습니다. 땅에 떨어진 윤리에 낙담한 이수광은 관직을 버리고 비우당에 은거했습니다. 이때 지봉유설을 편찬하였습니다.
비우당교는 유관과 이희검, 이수광이 집안 대대로 고위관료이면서도 청렴한 삶을 산 것을 기리기 위해 청계천 복원 사업 때 새로 만든 다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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