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1 |
다산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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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1 |
‘다산’은 조선 후기 실학자인 정약용의 호로 그를 기리기 위해 다리 이름을 다산교라고 했습니다. 다산교 남쪽에는 다산로가 이어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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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2 |
삼미자(三眉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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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2 |
정약용의 어릴 적 호는 삼미자(三眉子)였습니다. 그는 어릴 적에 천연두를 앓은 뒤에 오른쪽 눈썹 위에 자국이 남았는데, 그로인해 눈썹이 세 개인 것처럼 보여 그의 큰형 약현이 삼미자라는 호를 지어주었습니다. 정약용은 10살 이전에 지은 시를 모아 시집을 편찬할 정도로 영특하였는데, 시집명도 <삼미자집(三眉子集)>이었습니다. 1776년 15세의 정약용은 아버지를 따라 한양으로 이사했습니다. 이때부터 정약용은 실학에 뜻을 두기 시작했습니다. 22세 성균관에 들어가게 된 정약용은 남산아래 기거하였습니다. 자신의 거처를 ’누산정자(樓山精舍)‘라고 하였는데, 오늘날 회현동 아시아나항공 사옥 근처에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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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3 |
정조의 승하와 여유당(與猶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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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3 |
정약용은 누산정자에 사는 동안 인생의 황금기였습니다. 개혁군주 정조의 신임으로 39세까지 요직을 거치며 정조의 개혁구상인 수원화성을 설계하였습니다. 정조가 살아있는 한 훗날 재상에 오를 인재였습니다. 그러나 1800년 정조가 승하하고 개혁반대파인 노론벽파가 득세하자, 하루아침에 정약용은 죽음의 위기에 처했습니다. 여유당(與猶堂)이란 당호(堂號)를 지은 것도 이때였습니다. ‘겨울 냇물을 건너듯이 조심조심 세상을 살아야 한다.’는 뜻이었습니다. 겨우 살아남았지만 전남 강진으로 18년 동안 유배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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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4 |
다산 정약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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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4 |
유배 8년째 되는 해, 자연의 차가 많은 강진의 만덕산 아래 초가집을 지어 옮긴 정약용은 자신의 호도 다산이라 하였습니다. 정약용은 좌절하지 않고 목민심서를 비롯한 수많은 저서 집필하면서 조선후기 실학사상을 집대성한 위대한 학자가 되었습니다. 유배란 고난을 이겨내며 한 시대를 정진한 정약용의 삶이, 영욕의 근현대사를 견뎌온 청계천의 역정과 닮았습니다. 이를 상징하듯 다산교가 서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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