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1 |
오간수문(五間水門)과 오간수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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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1 |
조선이 한양에 터를 잡으면서 주변 산등성이를 따라 성벽을 쌓았습니다. 그런데 흥인문과 광희문 사이는 청계천 때문에 물길 위에 성벽을 쌓아야했습니다. 이곳에 성벽을 만들면서 청계천 물길이 나가도록 반원형태의 수문을 두었는데, 수문이 다섯 개여서 ‘오간수문’이라 불렀습니다. 1754년 영조 때 훈련원 병사들의 통행을 위해 오간수문 앞에 작은 돌다리를 만들었습니다. 일제는 오간수문을 허물었고 그 자리에 오간수교를 놓았습니다. 2005년 청계천 복원하면서 새로 다리를 놓고 그대로 오간수교라고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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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2 |
반정군과 임꺽정의 통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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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2 |
1506년 연산군을 몰아내고 중종을 세운 ‘중종반정’ 때 오간수문은 반정군의 도성 진입로였습니다. 그 뒤 오간수문은 반군의 통로로 항상 경계의 대상이었습니다. 1612년 광해군은 집권 대북파가 음모를 꾸며 김직재 역모사건을 만들자, 소북파를 대거 제거한 후, 오간수문을 둘러봤습니다. 「광해군일기」에는 왕이 "탈날 곳이 있는가를 살펴보고 부서진 곳은 고치도록 하라."고 지시하자, 사관은 ‘의구심이 많은 왕이 내심 전복되어 폐위 될 것을 두려워해서 오간수문을 살피게 했다’고 평했습니다. 오간수문은 철책으로 막았지만, 죄인들과 도둑들이 도성을 드나드는 통로로도 이용되었습니다. 특히 명종 때 의적 임꺽정은 도성 안에 집을 사두고 성을 드나들 때 오간수문을 이용하였기도 하였습니다. 1560년 관군의 장통방을 습격으로 그의 아내와 일당이 잡혀 전옥서에 감금되었습니다, 임꺽정은 오간수문을 이용해 탈출했고 백성들이 숨겨주었습니다. 2004년 청계천 복원공사 중 오간수문 터에서 조선시대의 돈인 상평통보 600여개가 발견되었습니다. 조선시대에 쌀 세가마를 살 수 있는 돈입니다. 임꺽정이 흘린 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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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3 |
오간수문 철거와 오간수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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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3 |
조선과 함께 500년 세월을 보낸 성벽 오간수문은 일제에 의해 의도적으로 훼손되었습니다. 일제는 1907년 7월 20일 고종을 강제 퇴위시키고, 한양침략을 쉽게 할 목적으로 도성의 주요 대문과 성벽을 허물기 시작했습니다. 1908년, 교통난 해결과 근대적인 도로 개설을 명분으로 흥인문 북측성벽과 남측 오간수문도 철거했습니다. 그 자리에는 콘크리트로 다리를 만들고, ‘오간수교’라고 이름 붙였습니다. 조선과 영욕의 세월을 함께 한 오간수문은 쓸쓸히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습니다. 현재 오간수교 아래쪽 벽면에는 조선 시대 오간수문과 돌다리를 작게 만들어 놓아 오간수문을 감상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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