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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 세계적으로 소빙하기에 접어들면서 조선도 겨울 뿐만 아니라 여름에도 서리가 자주 내릴 정도로 추워졌습니다. 이 때문에 한성 주변의 산은 땔감을 찾는 백성들의 불법 벌채로 몸살을 앓았습니다. 추위로 인하여 벌채가 얼마나 심했던지 숙종실록에는 “무뢰배들과 사대부 집안 종들이 함부로 벌채를 하는데, 산지기가 붙잡으려 하면 도끼를 휘둘러 위협하므로 말리지 못한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심한 벌채로 산은 날로 벌거숭이가 되어갔고, 비가 오면 한성주변의 산에서 토사가 지류를 따라 청계천에 흘러들었습니다. 청계천은 토사가 쌓이면서 물길이 막혔고, 오물이 쌓이고 해충이 들끓었습니다. 또한 조금만 비가 내려도 범람하여 한성 일대가 물에 잠겼습니다. 영조 때에는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는데, 암행어사로 유명한 박문수는 “수해로 인한 우환이 심해져 이제는 작은 비가 내려도 인가가 떠내려가고 또 물길이 막히고 고어서 병을 만드니 급히 터야 한다"고 하천바닥을 파내는 준천(濬川)이 시급함을 강조하였습니다. 오랜 고심 끝에 영조는 1760년 2월, 20만 명을 동원해서 57일간 청계천의 모래를 파내는 대규모 준천사업을 실시했습니다. 파낸 모래는 동대문 옆 청계천가에 쌓았는데, 야트막한 산 2개가 생길 정도로 엄청난 양이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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