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1 |
장통방 옆 장통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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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1 |
장통교는 한양의 행정구역인 5부 52방 중 장통방 옆에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조선 시대 장통교가 있었던 곳은 청계천과 남산에서 흘러내려 오는 남산동천이 합류하는 곳으로 10m내외이던 강폭이 20m로 갑자기 넓어지는 지점입니다. 이 지점에 세워진 장통교는 상류 다리보다 훨씬 길었습니다. 그래서 ‘긴 다리’라는 뜻으로 장교(長橋)라고도 불렀습니다. 장통교 근처에 긴 창고가 늘어서 있었다고 장창교(長倉橋), 장찻교다리 또는 줄여서 장교(長橋)라고도 했습니다. 장통교는 본래 8개의 교각이 있는 돌다리였는데, 1929년 큰 비가 와서 한복판 3간이 붕괴되었다가 복구되었습니다. 장통교는 청계천 복개로 사라졌고, 지금의 장통교는 2005년 청계천을 복원하면서 새로 만든 다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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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2 |
중촌의 역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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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2 |
장통교에서 수표교까지를 중촌이라고 하는데, 주로 역관과 의관 등의 중인들이 모여 살았던 곳입니다. 역관은 사신을 따라 중국과 일본 등을 드나들면서 통역과 외교 관련 업무, 정보 수집 등의 일을 맡았는데, 보수가 턱없이 적었습니다. 대신 나라에서 무역을 할 수 있는 권한을 주었습니다. 역관들은 주로 우리나라의 인삼을 가져다가 중국이나 일본에 팔거나 중국 비단을 사서 일본에 파는 중개무역을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했습니다. 당시에 ‘역관 가문 열 집의 재산이 나라 재산과 맞먹는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부자 역관들이 많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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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3 |
중촌의 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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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3 |
장통교 옆 중촌에 의사도 많이 살았습니다. 의원은 의술 활동을 통해 돈을 많이 벌었습니다. 조선 후기 상업의 발달로 한성에는 부유한 서민들이 많았습니다. 이들은 건강에도 관심이 많았는데, 18세기 이후에는 수많은 의원과 약방이 생겼습니다. 의원들은 환자를 검진하고 ‘약화제’라는 처방전을 써 주면, 환자는 약방에 가서 약을 지었습니다. 의약 분업이 철저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 조선 후기에는 소아과, 부인과, 외과 등에 전문 의원들도 등장했습니다. 전문 의원 중에는 요즘처럼 명의라고 소문난 의원도 많았는데, 옛날이나 지금이나 이런 의원을 만나기 위해서는 시간과 돈을 투자해야 했습니다. 장통교에는 의원을 찾는 사람들의 발길이 끝없이 이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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