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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상세
관리정보 JGS_000103 / 광통교
* 명칭 광통교 이명칭
개요 신덕왕후릉 장식돌로 만든 광통교

본문 정보
제목#1 광통교
내용#1 조선의 수도인 한양의 행정구역은 5부 52방으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광통교는 52방 중 하나인 광통방 옆에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광통교는 ‘넓게 통하는 다리’라는 이름에 맞게 조선 시대에는 가장 붐볐던 다리였습니다. 일제강점기와 청계천 복개로 콘크리트 밑에 있다가 2005년 청계천을 복원하면서 세상에 나왔습니다. 본래는 이곳에서 155m아래에 있는 광교자리에 있던 것을 지금의 광통교자리로 옮겨왔습니다. 광통교만 22개 청계천다리 중에서 유일하게 원형이 남아있는 다리입니다.
제목#2 신덕왕후와 태종의 원한
내용#2 한양 도성을 건설할 때 광통교는 흙다리였습니다. 태종 10년, 1410년 홍수가 나서 광통교가 쓸려가고 백성이 빠져 죽자, 의정부에서 “광통교의 흙다리가 비만 오면 무너지니, 청컨대 정릉(貞陵) 구기(舊基)의 돌로 돌다리를 만드소서.”라고 하여 왕이 그대로 따랐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광통교는 1412년 돌다리로 완성되었습니다.
정릉은 태종 이방원의 계모이자, 부왕인 태조 이성계의 두 번째 부인인 신덕왕후 강씨의 무덤입니다. 이성계는 첫 번째 부인이자 이방원의 친모인 신의왕후 한씨는 이성계가 왕이 되기 1년 전에 죽었습니다. 1392년 7월 이성계가 왕으로 즉위하자 신덕왕후가 조선의 첫 번째 왕비가 되었습니다. 이성계는 신덕왕후의 소생인 11세의 나이어린 막내 방석을 세자로 삼았습니다. 신하들이 세자 책봉에 대하여 “때가 평안할 때는 적장자를 세우고, 세상이 어지러울 때는 공이 있는 이를 우선한다.”면서, 당시는 조선 개국 초 혼란기이므로 조선 개국에 공이 큰 이방원을 염두에 두고 건의하였습니다. 이 말을 엿들은 신덕왕후의 통곡소리가 상황을 뒤집었습니다. 신덕왕후의 눈물 송사로 방석이 세자에 책봉되었고, 이방원은 깊은 원한을 가졌습니다. 1396년 신덕왕후가 병으로 죽자, 이성계는 경복궁에서 가까운 곳인 지금의 정동에 정릉을 만들었습니다.
제목#3 정릉의 석물로 만든 다리
내용#3 1398년 세자 방석을 죽이고 2년 후 왕좌에 오른 태종은, 이성계가 죽자 정릉에 함께 묻어 달라던 아버지의 유언을 무시하고 경기도 구리시 건원릉에 장사를 지냈습니다. 또한 정동에 있던 정릉을 멀리 성북구 정릉동으로 옯겼습니다. 후에 정릉의 정자각은 중국사신단의 숙소인 태평관을 짓는데 쓰게 하였습니다. 문무인석은 땅에 묻었고 병풍석과 난간석은 홍수로 떠내려간 광통교를 돌다리로 만드는데 쓰는 것을 허락하였습니다.
정릉의 석물을 광통교 재건에 이용하면서 백성들의 세금부담과 고역은 크게 줄었습니다. 정릉의 비극이 광통교의 재건이 된 역사의 아이러니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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