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1 |
조선시대 청계천의 이름은 ‘개천(開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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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1 |
1392년 개창한 조선왕조는 1394년에 한양(현재 한국수도 SEOUL)로 천도하였습니다. 한양에 궁궐을 짓고, 성을 쌓았는데 이를 한양도성(漢陽都城) 또는 줄여서 한성(漢城)이라고 합니다. 한양에는 한강으로 들어가는 자연하천이 있었습니다. 하천은 여름에 비가 많이 오면 민가와 다리가 떠내려가고 백성이 죽기도 했습니다. 천도 이후 수해가 잇따르자, 조선 3대 왕 태종은 5만 군사를 동원하여 자연하천을 넓고 깊게 파는 ‘개천’(開川)공사를 결정하였습니다. 1412년 개천공사가 끝났을 때 하천은 넓어지고 둑이 생기고 모전교, 광통교 등 돌다리도 생겼습니다. 이때부터 하천을 ‘개천’이라고 불렀습니다. ‘개천’은 조선시대 청계천을 부르는 이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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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2 |
영조의 준천(濬川)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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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2 |
17세기는 세계적인 소빙하기에 들어 그 시기에 조선도 매우 추웠습니다. 조선 백성들은 땔감을 찾느라고 불법으로 산의 나무를 마구 벌채하였습니다. 오랜 세월 벌채가 지속되자 산은 벌거숭이가 되었고, 비만 오면 민둥산의 토사가 흘러내려서 개천 바닥에 쌓여갔습니다. 개천은 점점 얕아져 영조 때에는 개천 바닥이 양쪽 둑 높이와 거의 같아질 정도였습니다. 그로인해 물길이 막혔고 오물이 쌓이고 해충이 들끓었습니다. 여름에는 조금만 비가 내려도 개천이 범람하여 한성이 물에 잠겼습니다. 영조는 오랜 고심 끝에 1760년 57일간 20만이 넘는 인원을 동원하여 개천바닥을 파내는 ‘준천(濬川)공사’를 벌였습니다. 태종 이래 350여 년 만에 이루어진 큰 공사로 개천은 다시 살아났습니다. 영조는 준천을 맡는 기관인 ‘준천사(濬川司)’를 설치했고, 준천사는 1882년 고종 때까지 ‘개천’의 준천과 관리를 담당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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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3 |
일제강점기 부분 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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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3 |
‘개천’이란 명칭이 언제 ‘청계천(淸溪川)’이 되었는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1914년 신문에서 개천 대신 ‘청계천’이라는 용어가 나옵니다. 일제가 조선을 강점하고 수탈하면서 터전을 잃은 빈민들이 한양으로 몰려들어 청계천 주변이나 다리 밑에 자리 잡았습니다. 또한 일본인들이 청계천 남쪽에 정착하여 개발이 이뤄지면서 한성인구는 엄청나게 늘었습니다. 1923부터 한성 곳곳에 상하수관을 매립하기 시작하였고 그곳으로 생활하수가 버려지면서 청계천의 오염이 심각해졌습니다. 일제는 더러워진 청개천을 복개하여 한성 남북을 쉽게 연결하는 교통로를 계획하였으나 공사비문제로 실행하지 못했습니다. 결국 1937년 중국을 침략하면서 원활한 군수물자 수송을 위해 청계천 상류부터 광통교까지 복개하였습니다. 이때부터 개천은 청계천이란 이름은 얻고 생명을 잃은 하천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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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4 |
한국전쟁 후 전면 복개(覆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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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4 |
한국전쟁 중 청계천은 잠시 깨끗해지기도 하였습니다. 전쟁이 끝나자 피난민이 돌아왔고, 전쟁으로 모든 것을 잃은 사람들은 서울로 들어와 청계천 양쪽과 바닥에 판자촌을 형성하였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사람은 더욱 늘었고 청계천은 생활하수와 오수가 넘쳐 물이 오염되면서 전염병을 일으켰습니다. 전쟁 후 개발이 최우선이었던 한국은 1958년부터 청계천을 콘크리트로 덮고 청계천의 다리들을 해체하였습니다. 판자촌은 헐렸고, 복개한 구간에는 도로가 생겼습니다. 그 위에 다시 고가도로가 세워졌고 도로 양편에는 상가건물이 들어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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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5 |
2005년 청계천 복원(復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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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5 |
40여 년을 도로 아래 있던 청계천은 2003년부터 진행된 복원공사로 2005년 세상에 나왔습니다. 하천을 덮었던 콘크리트가 사라지고 고가도로가 철거됐습니다. 또한, 22개의 새로운 다리를 놓았습니다. 현재 청계천에는 수돗물과 지하수가 방류되고 있고 지류는 복원되지 못했습니다. 청계천 다리는 옛 모습을 찾지 못한 아쉬움은 있습니다. 여러 문제점에도 콘크리트와 고가도로가 사라진 청계천 물길에는 맑은 하늘과 시원한 바람이 내려앉았고, 대한민국의 하늘을 품고 수많은 시민들의 휴식처로 자리 잡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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