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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장서를 가지고 상해로 간 사람은 심산 김창숙입니다. 그는 파리장서운동 발의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서명자 모집과 파리장서의 작성에도 깊이 관여했습니다.
심산 김창숙은 유교 이론보다 실천을 중시한 학자로서 실천을 하지 않는 성리학자를 ‘가짜 선비’라 불렀습니다. 을사늑약 때는 고종황제에게 늑약 파기를 주장하는 상소를 올렸고, 경북 성주지역 국채보상운동을 이끌기도 하였습니다. 한일병합이 가까워진 1909년에는 친일단체인 일진회가 덕수궁 대한문 앞에서 한일합방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이자, 성주유림을 모아 그에 반대하는 서명을 받으려다 성주군 일본헌병분견소에 구속되었습니다. 1919년에는 3·1 운동을 주도한 33인 중 조선을 이끌어왔던 유교학자가 단 한명도 포함되지 않음을 한탄하고는, 국제사회에 한민족 독립을 알리는 유림운동을 주도해 파리장서를 만들어 극비리에 상해로 갔습니다. 그는 이후 상해에 정착해 중국국민당 창립자인 쑨원[孫文]을 만나 한국독립운동후원회를 조직합니다. 이후 베이징으로 가서 우당 이회영과 함께 내몽골 지역에 군관학교를 설립하려 했으나 군자금이 부족하여 다시 국내로 들어옵니다. 그는 유림들을 만나 모금활동을 벌였고, 그가 돌아간 이후 협조한 이들이 검거되는 ‘제2차 유림단사건’이 발생합니다. 그는 이후 1926년 동양척식주식회사 경성지점과 식산은행에 폭탄을 던진 나석주의거를 계획합니다. 이듬해 이 일로 일본영사관 형사들에게 잡혀 감옥에 갇혀 혹독한 고문을 받고 14년형을 선고받습니다. 광복 후 미국과 소련에 의해 신탁통치가 이뤄진다는 소식을 듣고 분개하여 1948년 3월 김구·김규식·홍명희·조소앙·조성환·조완구 등과 함께 신탁통치반대운동에 나섭니다. 1952년에는 이승만 초대 대통령이 대통령 직선제 개헌안을 들고 나오자 이시영 등과 함께 ‘반독재호헌구국선언’을 하려다가 테러를 당하고 감옥에 갇혔습니다. 1956년 대통령선거에서는 신익희의 급서로 이승만이 당선되자 재선거를 요구하였고, 1959년에는 ‘반독재 민권쟁취 구국운동’에 나서면서 이승만에게 사퇴권고 서한을 보냈습니다. 말년의 그는 돈 없이 여관과 친척집을 전전하다가 1962년 84세에 병원에서 생을 마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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