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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상세
관리정보 JGH_001153 / 구 벨기에영사관
* 명칭 구 벨기에영사관 이명칭
개요 벨기에는 1901년 10월 17일 한비수호통상조약(韓比修好通商條約)을 체결하고, 1903년 회현동2가 78번지에 영사관(領事館) 건물을 신축하였다. 이후 1919년 충무로1가 18번지로 위치를 이전하였다.
설명 벨기에영사관(벨기에領事館)은 현재 우리은행 본점이 들어선 중구 회현동2가 78번지에 있었으나, 현재 지하철 4호선 명동역 부근인 충무로1가 18번지로 이전하였다. 조선과 벨기에간의 외교관계가 공식적으로 체결된 것은 1901년 10월 17일의 일로 벨기에 전권위원 빈가르트(Leon Vincart)가 외부대신(外部大臣) 박제순(朴齊純)과 조약을 비준하면서 이루어졌다. 그 시절에 벨기에는 백이의로 부르곤 하였으나 비리시(比利時)·비국(比國)·대비리시국(大比利時國)으로도 표기하였으므로, 이 조약은 한비수호통상조약(韓比修好通商條約)이라는 명칭으로 정리되었다. 벨기에 총영사(總領事)로는 빈가르트가 임명되었는데, 그는 1909년 9월까지 우리나라에 상주했다. 벨기에는 1902년 6월 10일 현재의 회현동2가 78, 79번지에 영사관 신축기지를 선정하고 2년여에 걸친 공사 끝에 1905년 지하 1층 지상 2층, 총건평 454평 규모의 영사관건물을 신축하였다. 벽돌과 석재(石材)를 혼용(混用)하여 지은 이 건물은 고전주의(古典主義) 양식(樣式)의 현관과 발코니의 아이오닉 오더(Ionic Order) 석주(石柱) 등 의장상(意匠上) 상당히 수려한 양식을 갖추고 있다. 설계자는 일본인 고타마[小玉]이고, 호쿠리쿠토목회사[北陸土木會社]의 니시무라[西村]가 감독하여 공사를 벌였던 것으로 알려진다. 건설공사는 모두 일본인들에 의해 이뤄졌는데, 러일전쟁으로 인해 공사기간이 조금 길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회현동에 있던 벨기에영사관이 그들의 첫 영사관 터였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벨기에는 이보다 앞서 정동지역에 영사관을 두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호암(湖巖) 문일평(文一平)이 《조광》에 기고한 ‘금석(今昔)을 말하는 외국영사관(外國領事館)의 기지 유래(基地 由來)’라는 글과 그레고리 헨더슨(Gregory Henderson)이 《로얄 아시아틱 소사이어티 한국》에 기고한 ‘정동지역과 미국대사관저의 역사’라는 글에 따르면, 그 위치는 정동 16-1번지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또한 위치만 추정할 뿐 개설 시기나 이곳이 그들의 첫 영사관이 맞는지의 여부 등은 알 수 없다. 벨기에영사관은 을사늑약(乙巳勒約) 이후에도 일본과의 외교관계를 지속하면서 영사관을 유지했으며, 1919년에는 회현동 영사관건물을 일본의 횡빈생명보험회사(橫濱生命保險會社)에 팔고 지금의 충무로1가 18번지 위치로 자리를 옮겼다. 그 후 이 건물은 일본 해군성(海軍省)에서 무관부(武官部) 관저로 쓰다가, 광복 후 해군 헌병감실과 상업은행에서 사용하던 중 1977년 11월 22일 사적 제254호로 지정되었다. 이후 서울특별시에서 새로 이전·복원을 위해 1980년 8월에 철거하여 1982년 8월 관악구 남현동 541번지 1·2·6·7호에 복원하였다.
역사정보 1901 한비수호통상조약 체결 1902 회현동2가 78, 79번지에 영사관 신축기지 선정 1903 벨기에영사관 완공 1919 횡빈생명보험회사에 영사관 건물 매각 후 충무로1가 18번지로 이전 1977 구(舊) 벨기에영사관 사적 제254호로 지정 1980 서울시에서 이전 복원을 위해 철거 1982 관악구 남현동 541번지 1·2·6·7호에 이전 복원
시대분류 일제강점기/1919(이전)
주제분류 문화/유적지, 사적지/사지, 전지, 유지, 원지
지번주소
도로명주소 서울특별시 중구 소공로 70(충무로1가 18)
지역 서울특별시 중구 충무로1가
시작일(발생일) 1919년(이전)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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