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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상세
관리정보 JGH_000110 / 동활인서 터
* 명칭 동활인서 터 이명칭
개요 동활인서(東活人署) 터는 동활인서가 소재하였던 곳으로, 지금의 서울특별시 중구 다산로33다길 41에 해당한다. 동활인서는 조선시대 부랑자나 가난한 환자를 치료하기 위해 동소문 밖에 설치한 의료복지기관이다. 원래는 성북구 동소문동에 있었지만 조선 후기에 중구 신당동으로 이전하였다.
설명 활인서(活人署)는 조선시대 부랑자나 가난한 환자를 치료하기 위해 한양 밖에 설치한 의료복지기관이다. 활인서의 전신은 동서대비원(東西大悲院)으로 1401년(태종 1)에 고려의 제도를 계승하여 설치되었다. 그러다 1414년(태종 14) 동서활인원(東西活人院)으로 개칭하였고, 1466년(세조 12)에 활인서로 통합되었다. 동활인서(東活人署)는 동소문 밖에, 서활인서(西活人署)는 서소문 밖에 있었다. 동활인서 터는 동활인서가 위치하고 있던 곳으로, 지금의 서울특별시 중구 다산로33다길 41에 해당한다. 활인서의 임무는 서민들의 질병을 치료하고 옷과 음식을 제공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때에 따라서는 한양의 부랑자를 수용하기도 하였으며, 전염병이 창궐할 때에는 병막(病幕)을 설치하여 환자를 돌보았다. 그리고 환자가 사망하였을 때에는 매장도 담당하였다. 이에 따라 활인서에는 의원과 함께 간사승(幹事僧), 매골승(埋骨僧) 등의 승려와 무당이 배치되어 치료와 간호를 담당하였다. 주요 재원은 한성부(漢城府) 무당에게 부과한 무세(巫稅)로 충당하였으며, 이 밖에 1455년(단종 3) 사사전(寺社田) 140결을 활인서에 할당하였다는 기록도 있다. 1709년(숙종 35)에 혜민서(惠民署)로 이속되었다가, 1774년(영조 50) 무세(巫稅)가 폐지되면서 활인서의 기능이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1784년(정조 8년) 신당동에 병막(病幕)이 설치되었는데, 이 시기에 성북구 동소문동에 있던 동활인서가 지금의 장소로 이전한 것으로 추정된다. 1882년(고종 19) 혜민서와 함께 폐지되었다.
역사정보 1401 동서대비원 설치 1414 동서활인원 1466 활인서로 통합 1709 혜민서에 이속 1784 성북구 동소문동에서 중구 신당동으로 이전된 것으로 추정 1882 혜민서와 함께 폐지
시대분류 조선/1700년대 후반
주제분류 문화/유적지, 사적지/사지, 전지, 유지, 원지
지번주소
도로명주소 서울특별시 중구 다산로33다길 41(신당동 236-2)
지역 서울특별시 중구 신당동
시작일(발생일) 1700년대 후반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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