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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상세
관리정보 JGH_001123 / 이회영 흉상
* 명칭 이회영 흉상 이명칭
개요 이회영 흉상(李會榮 胸像)은 대한제국기와 일제강점기에 활동한 독립운동가인 우당(友堂) 이회영(李會榮, 1867~1932)의 흉상이다. 2014년 2월 24일 우당기념관은 이회영 6형제가 태어난 생가터인 명동의 YWCA 건물 정문 맞은편에 높이 220cm, 폭 100cm의 청동 재질로 만든 흉상을 표지석과 함께 제작·설치하였다.
설명 이회영 흉상(李會榮 胸像)은 이회영(李會榮, 1867~1932)의 독립운동에 대한 열정과 희생을 기리기 위해 우당기념관에서 명동 YWCA가 기부한 이회영 6형제 생가터(YWCA 건물 정문 맞은편)에 높이 220cm, 폭 100cm의 청동 재질로 제작·설치하였다. 2014년 2월 24일에 이회영 흉상 제막식이 열렸다. 이회영은 대한제국기와 일제강점기에 활동한 독립운동가로, 본관은 경주(慶州)이며 호는 우당(友堂)으로 조선 후기에 판서를 지낸 이유승(李裕承)의 넷째 아들로 1867년 3월 17일에 태어났다. 이회영은 1905년 을사늑약(乙巳勒約)이 체결되자 미국에서 귀국한 안창호(安昌浩)를 비롯하여 양기탁(梁起鐸)·이동녕(李東寧)·신채호(申采浩) 등과 함께 비밀결사 신민회(新民會)를 조직하고 중앙위원으로 활약하였다. 이어 만주에 독립운동 근거지를 마련할 것을 협의하여 간도 용정촌(龍井村)에 서전서숙(瑞甸書塾)을 설립하고 이상설(李相卨)을 책임자로 두어 동포의 교육에 주력하도록 하였다. 1910년 일제에 의해 국권을 피탈 당하자 이회영은 형제일가들과 함께 전 재산을 정리해 항일운동에 헌납하고, 만주로 건너가 황무지를 개간하며 독립운동기지 건설에 매진하였다. 이후 이회영의 독립투쟁은, 국내외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한 3·1운동 이전까지의 활동과, 무정부주의 사상을 받아들여 그 이념과 노선에 따라 일제에 대한 테러 등의 무장운동을 전개한 중국에서의 활동으로 나뉜다. 1911년 만주에서 교민자치기관이자 독립운동단체인 경학사(耕學社)를 조직하고, 독립군지도자 양성을 목적으로 신흥강습소(新興講習所)를 설립하였다. 신흥강습소는 1919년 설립된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의 전신으로 이 학교 출신자들은 후에 청산리 전투의 주역이 된다. 그리고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가 상해(上海)에 수립되었으나 의견 차이로 분란이 끊이지 않자 상해보다는 북경(北京)에 체류하며 독립활동을 계속하였다. 1931년 한·중·일 아나키스트들과 합작하여 독립운동단체인 항일구국연맹(抗日救國聯盟)을 결성하여 의장으로 취임하였고, 흑색공포단(黑色恐怖團)을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1931년 이회영은 중국 국민당(國民黨)과 교섭하여, 자금과 무기지원을 확약받았으나, 다롄[大連] 항구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고문을 받다 1932년 순국하였다. 이회영의 묘는 현재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되어 있다. 1962년 대한민국 정부는 이회영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으며, 2000년 중국 정부는 항일혁명열사 증서를 수여하였다.
역사정보 1867 출생 1898 민중계몽운동 1906 신민회 활동 1907 서전서숙 개설 1908 상동청년학원 개설 1911 경학사 조직, 신흥강습소 설립 1919 신흥무관학교 설립 1924 재 중국 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 조직 1931 항일구국연맹 조직 1932 순국 1962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대한민국 정부) 2000 항일혁명열사 증서 수여(중국 정부) 2014 이회영 흉상 제작·설치
시대분류 현대/2014
주제분류 문화/축조물/동상
지번주소
도로명주소 서울특별시 중구 명동길 73(명동1가 1-3) YWCA회관 앞
지역 서울특별시 중구 명동1가
시작일(발생일) 201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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