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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상세
관리정보 JGH_001094 / 헐버트
* 명칭 헐버트 이명칭
개요 헐버트(Homer B.Hulbert, 1863~1949)는 1863년 미국에서 출생하여 1886년 육영공원(育英公院)의 외국어 교사로 조선으로 건너와 한국학 개척과 독립운동에 업적을 세운 인물이다. 선교사·한글학자·역사학자·언론인으로 한국의 국권회복운동에 힘썼으며 1949년 사망하여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楊花津外國人宣敎師墓園)에 안치되었다.
설명 헐버트(Homer B.Hulbert, 1863~1949)는 1863년 미국 버몬트(Vermont) 주 뉴헤이번(New Haven)에서 태어나 뉴햄프셔(New Hampshire) 주에 있는 다트머스 대학(Dartmouth College)을 졸업하고, 유니언 신학교에서 수학하였다. 1882년(고종 19) 조미수호통상조약(朝美修好通商條約, 조선과 미국 간에 체결된 국교와 통상을 목적으로 한 조약)이 체결되고 영어교육의 중요성이 대두되자 민영익(閔泳翊)이 육영공원(育英公院) 설립을 추진하였다. 그리고 1886년(고종 23) 육영공원 운영을 위해 미국에 3명의 교사를 요청하였는데, 이때 헐버트는 길모어(G. W. Gilmore)·벙커(D. A. Bunker) 등과 함께 조선으로 오게 되었다. 헐버트는 육영공원에 근무하며 영어를 가르쳤고, 조선정부가 설립한 최초의 서양식 병원인 제중원(濟衆院) 내의 학당에서도 수업을 하였다. 그는 자비로 한글을 배웠고 지식을 한글로 담아 《사민필지(士民必知)》를 펴내기에 이르렀다. 《사민필지》는 우주와 지구, 대륙과 각 나라에 대한 상세한 설명을 담아낸 책으로 조선인이 국제교류를 위해 꼭 배워야 할 정보들을 담았다. 그는 이 책을 육영공원의 교과서로 사용하였다. 1891년(고종 28) 헐버트는 육영공원의 재정상의 이유로 교사직을 사임하고 미국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그러나 2년 후, 미국 감리교회의 선교사 자격으로 다시 조선에 입국했다. 이후 그는 감리교 출판부에서 일하면서 배재학당(培材學堂)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헐버트는 조선에 체류하면서 일제의 침탈행위를 목격하고 조선의 자주독립을 지지하며 힘을 보탰다. 1895년(고종 32) 을미사변(乙未事變, 일본이 명성황후(明成皇后)를 시해한 사건) 이후 고종을 호위하고, 고종의 최측근으로서 외교의 창구 역할을 자청하였다. 1905년(고종 9) 일제가 강압적으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는 을사늑약(乙巳勒約)을 체결하자 을사늑약의 무효를 알리기 위해 고종으로부터 밀서를 받아 미국 대통령에게 전달하려 하였다. 1906년(고종 10)에는 고종에게 일제의 탄압행위를 헤이그(Hague)에 알리자는 건의를 하였고 헤이그에서 한국 대표단의 호소문을 회의시보에 싣게 하였다. 이 사건으로 헐버트는 대한제국에서 추방되었다. 이후에도 그는 각종 회의와 강좌 등을 통해 일본의 침탈에 대해 규탄하고 대한제국의 독립을 외쳤다. 2차 대전이 끝나고 대한민국이 수립된 후인 1949년, 42년 만에 한국 땅을 다시 밟았지만 여독(旅毒)으로 1주일 만에 병사하였다. 한국 땅에 묻히고 싶어 했던 그의 뜻을 따라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에 안치되었다. 사후(死後) 외국인 최초로 건국공로훈장 태극장이 추서되었고 2014년에는 한글 보전과 보급에 헌신한 공로로 대한민국정부에서 금관문화훈장을 추서했다. 저서로는 《한국사(The History of Korea)》2권, 《대동기년(大東紀年)》5권, 《대한제국 멸망사(The Passing of Korea)》 등이 있다.
역사정보 1863 미국 출생 1886 육영공원 교사로 조선으로 입국 1895 고종의 최측근으로 외교창구 역할 1906 헤이그에서 한국대표단 호소문 회의시보 기재로 대한제국에서 추방 1949 사망
시대분류 조선~현대/1863~1949
주제분류 문화/인물/기타
지번주소
도로명주소 서울특별시 중구
지역 서울특별시 중구
시작일(발생일)
인물 1863년~194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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