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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상세
관리정보 JGH_001093 / 위안스카이
* 명칭 위안스카이 이명칭
개요 위안스카이[袁世凱, 1859~1916]는 중국의 군벌(軍閥)정치가로서 중화민국(中華民國)의 초대 대총통(大總統)이다. 허난성[河南省] 샹청[項城] 출신으로 1882년(고종 19) 조선에 부임하여 청일전쟁 바로 전인 1894년(고종 31)까지 조선에 머물며 청나라 황제를 대신해서 조선의 내정간섭을 수행하였다. 귀국 후 청나라의 군권(軍權)을 장악하고 신해혁명(辛亥革命)으로 청나라를 무너뜨리고 중화민국의 초대 대총통이 되었다.
설명 위안스카이[袁世凱, 1859~1916]는 1859년(철종 10) 허난성[河南省] 샹청[項城]에서 태어났다. 과거(科擧)를 2번 낙방하고 우창칭[吳長慶]의 휘하에서 일을 맡았다. 1882년(고종 19) 조선에서 신식군대와 구식군대간의 차별문제로 구식군대가 임오군란(壬午軍亂)을 일으켰다. 그러자 위안스카이는 임오군란을 빌미로 오창칭을 따라 조선으로 부임하여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을 임오군란의 주동자로 지목하고 청나라로 압송하였다. 이후 통리조선통상교섭사의(統理朝鮮通商交涉事宜)가 되어 조선에 계속 주재하였다. 청나라 군이 조선에 주둔하게 되자 친청(親淸) 수구세력과 갈등을 하던 개화파의 입지가 흔들리게 되었다. 지속되는 압박에 1884년(고종 21) 김옥균(金玉均)을 중심으로 한 급진개화파가 일본과 손잡고 친청수구정책에 대항하여 정변을 일으키고 정권을 장악하였다. 이 때 위안스카이는 서울에 주둔하던 1500명의 군사를 이끌고 일본과의 전쟁도 불사하며 개화파를 공격하여 고종을 구출했다. 이 사건으로 청과 일본은 조선에서 양국의 군대를 철수시키는 톈진조약[天津條約]을 맺게 된다. 그러나 위안스카이는 철수하지 않고 이후에도 조선 주재 총리교섭통상대신(總理交涉通商大臣)에 취임하여 조선의 내정에 간섭하였다. 1894년(고종 31)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자 그는 청군을 파견하게 하였고, 이를 계기로 일본군도 톈진조약을 빌미삼아 조선에 상륙하였다. 이는 결국 청일전쟁으로 귀결되었다. 청일전쟁의 패배로 청나라 집권자였던 리훙장[李鴻章]이 실각하고 위안스카이가 그 자리를 대신하여 병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위안스카이는 서태후(西太后)의 총애를 얻어 요직을 역임하였다. 서태후가 죽은 후 정계에서 물러났지만 1911년 신해혁명으로 다시 군권을 장악하고 쑨원[孫文]과 손잡고 선통제(宣統帝) 푸이[溥儀]를 퇴위시켰다. 이후 1913년 중화민국의 초대 대총통이 되었고, 1916년 6월 사망하였다. 위안스카이는 조선에 10여 년을 거주하며 지금의 중구 충무로 거리 일대를 사들여 중국인 전용 거리로 만들기도 하였다. 그러나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청국 세력을 몰아내고 일본 세력을 확장시켜 충무로 일대를 본정통(本町通)이라 불렀다.
역사정보 1859 허난성 샹청 출생 1894 청일전쟁으로 병권장악 1913 중화민국의 대총통 취임 1916 사망
시대분류 조선~일제강점기/1859~1916
주제분류 문화/인물/기타
지번주소
도로명주소 서울특별시 중구
지역 서울특별시 중구
시작일(발생일)
인물 1859년~191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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