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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상세
관리정보 JGH_001088 / M.F.스크랜턴
* 명칭 M.F.스크랜턴 이명칭
개요 미국 감리교회 선교사 스크랜턴(Mary Flecher Benton Scranton, 1832~1909) 여사는 한국 최초의 근대 여성 교육기관인 이화학당(梨花學堂)을 설립하여 한국 여성교육의 기틀을 세운 사람이다.
설명 미국 감리교회 선교사 스크랜턴(Mary Flecher Benton Scranton, 1832~1909) 여사는 1885년 외아들인 윌리엄 스크랜턴(William B. Scranton) 부부와 함께 인천을 통해 한국에 들어왔다. 이후 서울 정동에 정착한 스크랜턴은 자신의 집에서 여성을 대상으로 학당을 시작했다. 이때 찾아온 학생들은 버려진 아이들과 첩들이었다. 학생들의 수가 늘어나자 고종은 배꽃같이 아름답게 꽃을 피워 알찬 열매를 맺으라는 의미에서 ‘이화학당(梨花學堂)’이라는 교명을 하사했다. 초창기 이화학당에서는 한글과 영어를 기초로 종교과목을 가르쳤다. 이화학당을 통해 여사는 한국의 개화기 여성교육을 담당함으로써 여성의 사회적 지위를 향상하는 사회활동의 의미를 심어주었다. 가부장제에 갇혀 있던 당시 여성들은 여사의 근대교육에 힘입어 사회와 민족에 당당히 자신의 이름을 새기게 되었다. 이화학당의 학생들은 3·1운동, 6·10만세운동 등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등 민족의식도 드높았다. 스크랜턴 여사와 이화학당은 이로써 한국여성의 사회적 지위향상에 출발점이 되었다. 1891년 스크랜턴 여사는 이화학당에서 물러나 ‘선교부인’을 조직하고 여성 선교에 힘썼다. 당시 사회는 아무리 선교사라 해도 남자가 함부로 여성에게 다가가 말을 걸기가 쉽지 않았고, 여성선교사의 수가 아주 적었기 때문에 여성신자들을 선교부인이란 이름으로 조직하여 스크랜턴 여사 본연의 임무인 선교에 주력했던 것이다. 이후 스크랜턴 여사는 1909년 서울 상동 자택에서 운명하기 전까지 여성전도에 힘쓰는 한편 한국여성의 의식향상과 사회활동 범위를 넓히는 데 매진했다. 그 선구적 공로가 인정받아 여사는 종교와 종파를 초월하여 ‘대부인(大夫人)’으로 불리게 되었다.
역사정보 1832 미국 매사추세츠에서 출생 1884 미국 감리교회 한국 선교사로 임명 1885 인천을 통해 한국에 입국 1886 이화학당 설립 1887 고종이 ‘이화학당’이라는 교명을 하사 1891 이화학당에서 물러나 ‘전도부인’이라는 여성선교단체 결성 1909 서울 상동 자택에서 사망
시대분류 조선~대한제국/1832~1909
주제분류 문화/인물/기타
지번주소
도로명주소 서울특별시 중구
지역 서울특별시 중구
시작일(발생일)
인물 1832년~190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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