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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상세
관리정보 JGH_001087 / 홍양호
* 명칭 홍양호 이명칭
개요 홍양호(洪良浩, 1724~1802)는 조선 중기 문신·학자로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한사(漢師), 호는 이계(梨溪)이다. 서울에서 태어나 지금의 충무로 2가에 자리한 홍씨 가문의 대저택이었던 사의당(四宜堂)을 물려받아, 많은 골동품을 수집하여 이곳에 보관하였다. 홍양호는 북학파(北學派)의 한사람으로 이용후생(利用厚生)을 주장하며 수레와 벽돌의 사용 등을 권장하였고, 상업과 대외무역을 중시하였다. 문장 외에도 지리·고증학·식목(植木) 등에도 뛰어나 영조에게 박학(博學)으로 인정받았다.
설명 홍양호(洪良浩, 1724~1802)는 1747년(영조 23)에 진사가 되고, 1752년(영조 28)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한 뒤 지평(持平)·수찬(修撰)·교리(校理)를 지냈으며 1774년(영조 50), 등준시(登俊試)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782년(정조 6) 동지부사(冬至副使)가 되어 청나라에 다녀왔다. 그 뒤 대사헌(大司憲)이 되었고 이후 대제학(大提學)·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를 겸하였다. 홍양호는 청나라의 우수한 문명을 받아들여 배워야한다고 주장한 북학파(北學派)의 한 사람으로 상업을 중시했으며 대외무역을 강조했다. 또한 수레와 벽돌의 사용 등을 주장하여 실생활에서 도구의 사용을 적극 권장하였다. 홍양호는 학문과 문장에 뛰어나 《영조실록(英祖實錄)》《국조보감(國朝寶鑑)》《갱장록(羹墻錄)》《동문휘고(同文彙考)》 등의 편찬에도 참여하였다. 영조는 그의 박학함을 칭찬하여 의심이 나면 반드시 그에게 의견을 물었다고 한다. 홍양호는 서울의 남산 기슭에 풍산 홍씨 가문의 저택인 사의당(四宜堂)에 살았다. 사의당은 풍산 홍씨가 7대에 걸쳐 150년 동안 거주한 곳이다. 전체 100칸이나 되는 정당(正堂)을 중심으로 서쪽으로 수약당(守約堂), 북쪽에 북하당(北下堂), 동편 뒤쪽에는 후당(後堂) 등의 부속 건물이 있었으며 기암괴석으로 인공산까지 꾸며진 대저택이었다. 홍양호의 손자인 홍경모(洪敬謨)는 이러한 사의당의 규모를 써서 글로 남겼는데, 이것이 바로 《사의당지(四宜堂志)》이다. 《사의당지》는 당시 사대부 주거문화의 실제 생활상을 담고 있어서 역사적 자료로 크게 평가받고 있다. 중국에 사신으로 갔을 때 대구형(戴衢亨), 기효람(紀曉嵐) 등의 학자와 교유(交遊) 하였고 귀국한 후에는 고증학(考證學)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그는 글씨에도 능하였는데 특히 진체(晉體)와 당체(唐體)에 뛰어났다. 시호는 문헌(文獻)이며 저서로는 《이계집(耳溪集)》이 있다. 편서로는 《만물원시(萬物原始)》《육서경위(六書經緯)》《군서발배(群書發排)》《격물해(格物解)》《칠정변(七情辨)》《목민대방(牧民大方)》《향약절중(鄕約折中)》《해동명장전(海東名將傳)》《고려대사기(高麗大事記)》《북새기략(北塞記略)》 등이 있다.
역사정보 1724 출생 1782 동지부사로 청나라 방문 1802 사망
시대분류 조선/1724~1802
주제분류 문화/인물/기타
지번주소
도로명주소 서울특별시 중구
지역 서울특별시 중구
시작일(발생일)
인물 1724년~180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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