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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상세
관리정보 JGH_001084 / 허균
* 명칭 허균 이명칭
개요 허균(許筠, 1569~1618)은 본관은 양천(陽川), 자는 단보(端甫), 호는 교산(蛟山)·학산(鶴山)·성소(惺所)·성수(惺叟)·백월거사(白月居士)가 있다. 동지중추부사 (同知中樞府事) 허엽(許曄)의 아들이다. 조선 중기의 문신·문필가로서 형들인 허성(許筬)·허봉(許篈) 등이 모두 알려졌고 그의 누이 허난설헌(許蘭雪軒) 역시 여류 문필가로서 명성을 떨쳤다. 실제로 그는 정치인으로서 보다 최초의 한글소설 《홍길동전》을 쓴 소설가로서 더 잘 알려져 있다. 유교(儒敎)사상에 얽매이지 않은 사상적 배경으로 민본사상(民本思想)과 신분계급의 타파에 따른 평등한 인재등용, 붕당(朋黨)배척 등의 개혁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설명 남산 아래 마른내 근처(현 중구 인현동1가)에서 태어난 허균(許筠, 1569~1618)은 5세 때부터 글을 배우기 시작할 정도로 영특하였다. 12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더욱 글공부에 매진하였다. 유성룡(柳成龍)·이달(李達)의 문인으로 학문과 시를 배웠다. 그는 기묘한 것을 좋아했으며 얽매이는 것을 싫어하는 기벽(奇癖)이 있어서 유교뿐 아니라 불교(佛敎)와 도교(道敎)에까지 관심과 조예가 깊었다. 유교사상에 얽매이지 않은 탓에 민본사상과 신분계급의 타파에 따른 평등한 인재등용 그리고 붕당배척 등의 사상적 배경을 가지고 있었다. 그로인해 서얼차별의 부당함과 부패관료를 규탄하는 글을 여러 편 남겼고, 정도전(鄭道傳)·김종직(金宗直)을 신랄하게 비판하여 사림파들에게 온갖 인신공격을 받게 된다. 정치적으로도 불교를 믿는다는 이유로 잦은 파직과 유배를 당하였다. 1589년(선조 22) 생원시에 합격하고 1594년(선조 27) 정시문과(庭試文科)에 급제하여 검열(檢閱)·시강원설서(侍講院設書) 등의 관직에 제수되었는데 1607년(선조 40)에는 봄부터 가을까지 매월 3번씩 무려 27번이나 문신월과(文臣月課)에 장원할 정도로 뛰어난 재능의 소유자였다. 그러나 뛰어난 재능과는 달리 관직의 길은 부침이 잦았다. 황해도도사(黃海道都事)에 제수되었을 때 서울의 기생을 끌어들였다는 이유로 탄핵되어 파직되었다. 이후에도 불교를 믿는다는 이유로 여러 차례 파직 되었고 1610년(광해군 2)에는 전시(殿試)의 시관으로 있으면서 조카와 사위를 부정 합격시켰다는 이유로 파직 유배되었다. 복직되어 돌아온 해인 1613년(광해군 5) 평소 친교가 있던 박응서(朴應犀)·서양갑(徐羊甲)·심우영(沈友英) 등이 김제남(金悌男)을 추대하여 모반을 했다는 계축옥사(癸丑獄事) 사건이 발생했다. 이에 연루될 것을 두려워한 허균은 신변의 안전을 위해 이이첨(李爾瞻) 등 대북파의 핵심들과 정치적으로 밀착되었다. 그래서 인목대비(仁穆大妃) 폐모론이 일어났을 때도 과감하게 이에 앞장서서 인목대비의 처벌을 주장했다. 그러나 이이첨과의 밀착은 오래가지 못하고 1617년(광해군 9) 하인준(河仁俊) 등과 함께 인목대비를 추대하여 반란을 시도했다는 죄명을 얻어 처형당했다. 그는 보기 드물게 뛰어난 문재를 지녔고, 조선 중기의 사상에서도 이채를 띄는 인물이다. 그의 사회비판 소설 《홍길동전》에서 볼 수 있듯이 그는 기존의 고정관념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영혼을 지니고 있었고, 당시 현실에 대한 대담한 개혁의식을 지니고 있었다. 저서로는 《홍길동전》《남궁선생전》《교산시화(蛟山詩話)》《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성수시화(惺叟詩話)》《학산초담(鶴山樵談)》《도문대작(屠門大爵)》《한년참기(旱年讖記)》《한정록(閑情錄)》 등이 있다.
역사정보 1569 남산 마른내 근처(현 중구 인현동1가)에서 출생 1618 사망
시대분류 조선/1569~1618
주제분류 문화/인물/기타
지번주소
도로명주소 서울특별시 중구
지역 서울특별시 중구
시작일(발생일)
인물 1569년~161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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