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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상세
관리정보 JGH_001083 / 한치윤
* 명칭 한치윤 이명칭
개요 한치윤(韓致奫, 1765~1814)은 조선 후기의 학자로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대연(大淵), 호는 옥유당(玉蕤堂)이다. 아버지는 한원도(韓元道)이며 한성부 남부 나동(현 남산동 1가)에서 태어났다. 그는 실학자로서 일찍이 관직을 단념하고 학문에 매진하여 역사연구에 중요한 업적을 남겼다. 북경에서 청조문물을 접하고 돌아온 뒤 우리역사를 고증한 《해동역사(海東繹史)》를 편찬하였다.
설명 한치윤(韓致奫, 1765~1814)은 1789년(정조 13)에 진사시에 급제하였으나 대과를 단념하고 평생을 오직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1799년(정조 23) 진하사(進賀使)의 서장관(書狀官)인 족형(族兄) 한치응(韓致應)을 수행하여 북경에 머물면서 청조문물을 관찰할 수 있었다. 연행에서 돌아온 후 고증적 입장에서 우리역사를 서술하여 《해동역사(海東繹史)》를 편찬했으나, 원편(原篇)만 끝냈을 뿐 마치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그의 사후에 조카인 한진서(韓鎭書)가 이를 완성하였다. 《해동역사》는 기전체(紀傳體) 형식으로 외국자료에 의한 객관적 기술을 통해 통사를 서술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고증을 위한 사료로서 중국자료 523종과 일본자료 22종을 이용했고, 우리자료 수십 종을 들어서 외국자료와 대비했다. 이는 우리와 중국의 기존 역사편찬을 보완하고 체계적인 우리 역사를 이루려 한 노력의 일환이었다. 한치윤의 이러한 작업은 지나치게 객관성을 추구하다 오히려 중국 사료의 무조건적인 인용 등 외국자료에 지나치게 의존한 점이 아쉬운 부분이나, 비판정신과 고증적 역사 인식에 입각하여 한국사 연구에 새로운 방법을 제시한 점은 크게 인정받았다. 학문에 대한 새로운 시도는 후대에 많은 영향을 미쳐, 한치윤이 50세의 나이로 죽은 뒤에도 그의 학덕을 칭송하는 인물이 많았다. 후에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는 그에 대해 “겉보기에는 빈한하고 쇠약하기 짝이 없어서 입은 옷도 무거워 보이지만, 속으로는 홀로 천고의 마음을 갖추었도다”라고 평하였다.
역사정보 1765 한성부 남부 나동(현 남산동 1가)에서 출생 1799 북경 방문 1814 사망
시대분류 조선/1765~1814
주제분류 문화/인물/기타
지번주소
도로명주소 서울특별시 중구
지역 서울특별시 중구
시작일(발생일)
인물 1765년~181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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