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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상세
관리정보 JGH_001082 / 한준겸
* 명칭 한준겸 이명칭
개요 한준겸(韓浚謙, 1557~1627)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익지(益之)이며 호는 유천(柳川)이다. 판관 한효윤(韓孝胤)의 아들이며 인조의 장인으로 지금의 중구 회현동 2가에 거주하였다. 예학(禮學)과 국가의 고사(故事)에 밝았으며 시문에도 조예가 깊었다. 선조의 유교칠신(遺敎七臣)중 한 사람으로 영창대군을 보필하였고, 인조의 장인으로 서평부원군(西平府院君)에 봉해졌다.
설명 한준겸(韓浚謙, 1557~1627)은 1579년(선조 12)에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1586년(선조 19)에 문과에 급제하여 검열(檢閱)이 되었다. 선조가 출제한 시제(試題)에서 장원하여 선조로부터 총애를 받아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였다. 1589년(선조 21) 금천현감(衿川縣監)으로 있을 때 정여립(鄭汝立)의 반란이 일어나자 정여립의 생질이었던 이진길(李震吉)을 천거한 일로 연좌되어 여러 달 옥에 갇혔다가 풀려나 원주(原州)로 이사하였다. 1592년(선조 25) 다시 복직되었고 임진왜란(壬辰倭亂) 중 명나라 마귀(麻貴)를 도와 식량·마초(馬草) 수집과 저장을 담당하였다. 왜란이 끝난 뒤 우승지(右承旨)에 책봉되어 변방의 소식을 빨리 전달할 수 있는 파발(擺撥)의 설치를 건의하였다. 이후 경상도관찰사(慶尙道觀察使)로 부임할 때 문홍도(文弘道)의 무고로 파직되었다. 이듬해 병조참판(兵曹參判)으로 임용되었고 이덕형(李德馨)의 추천으로 사도도원수(四道都元帥)에 올랐다. 이후 여러 요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1609년(광해군 1)에 선조가 죽기 전 영창대군(永昌大君)의 보필을 부탁한 유교칠신(遺敎七臣) 중 한 사람이었던 한준겸은, 1613년(광해군 5) 영창대군을 옹립하여 역모하였다는 이유로 계축옥사(癸丑獄事)에 연루되어 유배를 간다. 그러나 유배지에서 오랑캐의 침입에 대비할 적임자로 뽑혀 중추부지사(中樞府知使) 겸 오도도원수(五道都元帥)가 되어 국경수비에 힘썼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능양군(綾陽君)이 왕위에 오르자 능양군의 처였던 한준겸의 딸은 인열왕후(仁烈王后)가 되었다. 그래서 한준겸도 서평부원군(西平府院君)에 봉해졌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丁卯胡亂)을 겪고 병세가 심해져 사망하였다. 시호는 문익(文翼)이다. 기국(器局)이 큰 사람으로 예학(禮學)과 국가의 고사(故事)에 밝았으며 높은 직책에 있었음에도 청렴하였으며 당색을 떠나 인망이 두터웠다. 저서로 《유천유고(柳川遺稿)》가 있다.
역사정보 1557 출생 1623 서평부원군으로 봉해짐 1627 사망
시대분류 조선/1557~1627
주제분류 문화/인물/기타
지번주소
도로명주소 서울특별시 중구
지역 서울특별시 중구
시작일(발생일)
인물 1557년~162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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