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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상세
관리정보 JGH_001081 / 한명회
* 명칭 한명회 이명칭
개요 한명회(韓明澮, 1415~1487)는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자준(子濬), 호는 압구정(狎鷗亭)·사우당(四友堂)이다. 세조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고, 시호는 충성(忠成)이다. 그는 칠삭둥이로 어려서 부모를 잃는 등 젊어서는 불우하여 떠돌았지만, 세조의 계유정란(癸酉靖難)을 성공으로 이끈 후 3번이나 재상의 자리에 올랐고 4차례 공신호(功臣號)를 받았다. 또 두 딸이 각각 예종비(睿宗妃), 성종비(成宗妃)에 책봉되어 국구(國舅)로서 영화를 누렸다.
설명 한명회(韓明澮, 1415~1487)는 서울 남산 근처(현 예장동)에서‘칠삭둥이’로 사지가 제대로 갖춰지지 않고 태어났다고 한다. 일찍이 부모를 잃고 불우하게 지내서 30세가 넘어서도 양민에 머물러 있었다. 1452년(문종 2) 음사(蔭仕)로 출사하여 경덕궁직(敬德宮直)이라는 한직에 머물러 있었는데, 친구 권람(權擥)의 소개로 수양대군(首陽大君)을 알게 되어 그의 행로가 바뀌게 되었다. 이 때 한명회는 수양대군으로부터 지략을 인정받아 ‘나의 장자방(張子房)’이라 불릴 정도로 신임을 받았다. 이후 한명회는 수양대군의 계유정난(癸酉靖難)을 진두지휘하였다. 이때의 공으로 정난공신(靖難功臣) 1등에 책봉되고 사복시소윤(司僕寺少尹)에 올랐다. 1455년(세조 1), 세조가 즉위하자 좌익공신(佐翼功臣) 1등으로 우승지(右承旨)가 되었다. 이후 단종 복위운동을 하던 성삼문(成三問), 박팽년(朴彭年) 등이 광연루(廣延樓)에서 거사를 일으키려고 하자 이를 미리 알아채고 막아냈다. 한명회는 세조 집권 초반부터 변방의 축성(築城)과 병력 양성을 건의하였다. 이후 병조판서로 재직 중에는 직접 출정하여 야인들을 토벌하고 축성하는 등 국방활동에 크게 기여하였다. 그 결과 1462년에는 상당부원군(上黨府院君)에 봉작되었고 우의정(右議政)에 올랐다. 이후 계속되는 승진으로 1466년 영의정(領議政)이 되었다. 이듬해 이시애(李施愛)의 난이 일어나자, 이시애로부터 모함을 당해 사직하였으나 곧 복직하였고 세조가 승하한 후 원상(院相)으로 정무를 처결하였다. 예종 즉위 후 남이(南怡)의 모역사건 처리에 대한 공으로 익대공신(翊戴功臣) 1등에 책봉되었다. 예종이 단명하여 성종이 즉위하자, 성종 즉위를 지지한 공으로 좌리공신(佐理功臣) 1등의 공신호(功臣號)를 받았으며 원상으로서 정무를 보았다. 그는 부와 명성을 쌓은 뒤 한강변에 압구정(狎鷗亭)을 짓고 여러 선비들을 모아 시연을 베풀곤 하였다. 그의 정자는 중국 사신들에게까지 알려질 정도로 풍광이 유명하였다. 하지만 압구정에서 명나라 사신들을 사사로이 접대한 일로 탄핵 당하기도 하였다. 영의정에 오르고 공신호를 4번이나 받았으며 예종·성종의 장인이기도 한 한명회는 변방을 방위하고 요충지를 만들어 축성하는 등의 군사적 업적을 세웠으며, 오가작통법(五家作統法)·면리제(面里制) 등을 만들어 행정적으로도 기여한 바가 있었다. 하지만 능력을 자신의 영달에 사용하고 부의 축적을 위해 관직을 사고파는 등, 수단을 가리지 않은 면은 비판을 당하기도 하였다. 또한 계유정난을 주도하고 정치적인 이득을 위해 성종을 추대하는 등 모사에 능한 간신의 모습으로 많이 알려져 있다.
역사정보 1415 출생 1455 계유정란의 공으로 좌익공신 1등에 책봉 1487 사망
시대분류 조선/1415~1487
주제분류 문화/인물/기타
지번주소
도로명주소 서울특별시 중구
지역 서울특별시 중구
시작일(발생일)
인물 1415년~148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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