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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상세
관리정보 JGH_001080 / 한규설
* 명칭 한규설 이명칭
개요 한규설(韓圭卨, 1848~1930)은 조선 후기의 무신으로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순우(舜佑), 호는 강석(江石)이다. 부사 한승렬(韓承烈)의 아들로 서울에서 태어나 중구 장교동에 살았다. 을사늑약(乙巳勒約) 당시 참정대신(參政大臣)을 지냈던 인물로 총칼의 협박을 물리치고 을사늑약에 반대하였다. 또한 유길준의 《서유견문(西遊見聞)》 집필을 도왔고, ‘민립대학기성회(民立大學期成會)’를 통해 국민의 신식교육을 위해 노력하였다.
설명 한규설(韓圭卨, 1848~1930)은 일찍이 무과에 급제하여 여러 무관직을 역임하였다. 1885년(고종 22) 우포도대장(右捕盜大將)으로 있을 때 갑신정변(甲申政變)에 연루된 유길준(兪吉濬)을 보호할 목적으로 자택에 연금하였다. 그리고 유길준을 도와 《서유견문(西遊見聞)》을 집필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후 《서유견문》은 갑오개혁(甲午改革)의 사상적 배경이 되었고 계몽사상(啓蒙思想) 형성에 영향을 주었다. 1890년(고종 27) 일본 상인들이 종로 일대에 점포개설을 요구하자 종로 상민들이 일어나 1차·2차에 걸쳐 폐문철시(閉門撤市)하고 시위하는 사태가 일어났다. 이 때, 한규설이 고종의 밀명을 받아 배후에서 조직적으로 상민을 선동하여 일본상인의 종로 진출을 막았다는 기록이 청나라에 남아 있다. 한규설은 이후에도 고종의 절대적인 신임을 얻어 의정부찬성(議政府贊成) 등을 역임하였다. 1905년(고종 9), 한규설은 참정대신(參政大臣)으로 내각을 조직하였다. 1905년은 을사늑약(乙巳勒約)이 이루어진 해로, 일본은 조약을 통해 한국에서의 우월권을 확보하였다. 또 이를 계기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파견하여 이른바 ‘한·일 신협약’이란 미명 아래 보호조약을 강제로 체결하려 했다. 이토 히로부미는 수십 명의 헌병을 동원하여 각료(閣僚)들에게 개별적으로 조약의 찬성과 반대 여부를 물었다. 이 때, 한규설은 무조건 불가라고 하여 일본헌병에 의해 감금되고 파면되었다. 1910년 조선이 일본에 강점된 후, 일본정부는 한규설에게 남작의 칭호를 내려주었으나 한규설은 이를 거절하고 은거했다. 1920년 이상재(李商在) 등과 함께 조선교육회(朝鮮敎育會)를 창립하고 이를 ‘민립대학기성회(民立大學期成會)’로 발전시켰다. ‘민립대학기성회’는 조선에 신식교육을 널리 가르치고자하여 민립대학을 설립하려 하였으나 일본의 방해로 민립대학의 설립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민립대학기성회’는 꾸준히 활동하며 해방 이후에 이어져 국립 부산대학교 설립에 기여하였다.
역사정보 1848 출생 1905 을사늑약에 반대하여 파면 1930 사망
시대분류 조선~일제강점기/1848~1930
주제분류 문화/인물/기타
지번주소
도로명주소 서울특별시 중구
지역 서울특별시 중구
시작일(발생일)
인물 1848년~193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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