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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상세
관리정보 JGH_001079 / 최만리
* 명칭 최만리 이명칭
개요 최만리(崔萬理, ?~1445)는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자명(子明), 호는 강호산인(江湖散人)으로 고려전기 문신 해동공자(海東孔子) 최충(崔沖)의 후손이다. 조선 전기의 문신·학자로 한성부(漢城府) 서부 반석방 만리현(현 중구 만리동)에 살았다. 올곧은 성품으로 이름 높았으며 부정과 타협을 모르는 정직한 관리로 청백리(淸白吏)에 녹선(錄選)되었다. 작은 잘못도 간언하여 바로잡으려는 모습이 높이 평가되었으나, 한글창제에 대해 적극적으로 반대하여 물의를 일으켰으며 그에 대한 책임을 지고 사직하였다.
설명 최만리(崔萬理, ?~1445)는 1414년(태종 14)에 생원이 되고, 1419년(세종 1)에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급제하여 홍문관(弘文館)에 기용되었다. 1427년(세종 9) 교리(校理)로서 문과중시(文科重試)에 급제하였다. 그 후 고제도(古制度) 연구에 몰두하여 제도에 대한 문제점들을 지적하고 시정하였다. 최만리는 집현전(集賢殿) 부제학(副提學)에 오를 정도로 세종에게 능력을 인정받았다. 그러나 부제학에 재직하던 중 타협을 모르는 성격으로 인해 세종과 충돌이 잦았다. 세종은 불교에 우호적이었던 반면, 최만리는 불교의 배척을 주장하고 유교사상을 엄격하게 적용하려 하였다. 세종이 대궐 안에 불당(佛堂)을 만들자 6차례에 걸쳐 그 부당함을 아뢰어 상소를 올렸다. 1444년(세종 26), 세종이 훈민정음을 반포하자, 최만리는 훈민정음 창제를 반대하는 학자들과 함께 6조목의 이유를 들어 연명상소(連名上疏)를 올렸다. 한글을 ‘비언무익(鄙諺無益)’, 즉 비속하고 학문에 도움이 되지 않는 글자라고 주장하였을 정도로 상소문은 강경하였고, 분노한 세종은 최만리를 의금부에 하옥하였다. 다음날 석방되었으나 집현전 학자를 대표하여 낙향하였으며 다음해에 사망하였다. 곧은 성품으로 작은 잘못 하나도 넘어가지 않고 반드시 간언을 하여 당시 이름이 높았으며 청백리에 녹선(錄選)되었다. 시호는 공혜(恭惠)이다. 저서로는 《자치통감훈의(資治通鑑訓議)》《정관정요주(貞觀政要註)》가 있다.
역사정보 1444 한글창제 반대 상소를 올려 의금부에 투옥되고 사직 1445 사망
시대분류 조선/?~1445
주제분류 문화/인물/기타
지번주소
도로명주소 서울특별시 중구
지역 서울특별시 중구
시작일(발생일)
인물 ?~144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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