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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상세
관리정보 JGH_001077 / 조만영
* 명칭 조만영 이명칭
개요 조만영(趙萬永, 1776~1846)은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풍양(豊壤), 자는 윤경(胤卿), 호는 석애(石崖)이다. 판서 조진관(趙鎭寬)의 아들이며 신정왕후(神貞王后)의 아버지다. 조만영은 조선 후기 풍양 조씨 세도정치의 중심인물이다. 그의 딸이 순조의 맏아들이었던 효명세자(孝明世子)와 결혼하여 세자빈이 된 것을 계기로 병권과 인사권을 잡았으며, 비변사(備邊司)를 장악하여 실권을 쥐었다.
설명 조만영(趙萬永, 1776~1846)은 1813년(순조 13)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검열(檢閱)이 되었다. 1815년(순조 15)에는 홍문록(弘文錄)에 오르고 지평(持平)·정언(正言) 겸문학(兼文學)을 지냈다. 전라도 암행어사로 나아가 고을을 잘 다스리지 못한 수령들을 다스리고 각종 폐단을 시정하였다. 조만영은 문우(文友)와 교우하기를 좋아해서 남산 북쪽에 노인정을 지어 문우들과 어울렸으며, 옥수동 한강변 동호에 쌍호정(雙虎亭)을 지어 한강의 풍경을 즐겼는데 훗날 조만영의 딸로 효명세자(孝明世子)와 혼인하였던 조대비가 이곳에서 태어났다. 1819년(순조 19) 부사직(副司直)으로 있을 때 그의 딸이 세자빈으로 간택되어 풍은부원군(豐恩府院君)으로 왕실과 척(戚)을 맺었다. 이후 성균관대사성(成均館大司成)·금위대장(禁衛大將)·예조판서(禮曹判書)등 요직을 거쳤고 효명세자가 대리청정을 하면서 이조판서(吏曹判書)와 어영대장(御營大將)을 겸임하였다. 이때 순조는 안동김씨의 세도정치에 싫증을 느끼고 있었다. 이를 타개하기 위하여 효명세자의 대리청정을 계기로 세자의 외척인 풍양 조씨가 대거 발탁되었다. 조만영은 동생 조인영(趙寅永) 등과 국정의 중심기관인 비변사(備邊司)를 장악하여 병권을 쥐었고 풍양 조씨 세도의 기반을 다졌다. 효명세자가 사망하고 몇 년 뒤, 효명세자의 아들인 헌종이 8세의 나이에 즉위하였고 조만영의 딸은 대왕대비가 되어 수렴청정을 하게 되었다. 그러자 조만영은 1836년(헌종 2) 남응중(南膺中)의 모반사건과 1844(헌종 10) 민진용(閔晉鏞)의 모반사건을 다스리며 헌종의 왕권 강화에 힘을 썼다. 1839년(헌종 5)에는 천주교를 사학(邪學)으로 규정하고 기해박해(己亥迫害)를 일으켰다. 명분은 천주교에 가담하거나 방조한 이들을 다스리겠다는 것이었으나 실제로는 안동김씨 세력을 제거하려는 목적이었다. 이 사건으로 천주교에 관대하였던 안동김씨 세력은 타격을 입게 되었고, 조만영은 풍양 조씨의 세도를 확립하게 되었다. 1845년(헌종 11) 맏아들 조병귀(趙秉龜)가 사망하자 조만영은 아들의 죽음을 매우 슬퍼하다 병을 얻었고 끝내 회복하지 못하여 아들이 죽은 이듬해에 사망하였다. 사후에 영의정으로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충경(忠敬)이다. 저서로는 《동원인물고(東援人物考)》가 있다.
역사정보 1776 출생 1819 풍은부원군으로 봉해짐 1846 사망
시대분류 조선/1776~1846
주제분류 문화/인물/기타
지번주소
도로명주소 서울특별시 중구
지역 서울특별시 중구
시작일(발생일)
인물 1776년~184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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