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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상세
관리정보 JGH_001076 / 정태화
* 명칭 정태화 이명칭
개요 정태화(鄭太和, 1602~1673)는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유춘(囿春)이고 호는 양파(陽坡)다. 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를 지낸 제곡(濟谷) 정광성(鄭廣成)의 아들로 중구 회현동에 살았다. 효종·현종 때의 명정승(名政丞)으로 6차례나 영의정(領議政)을 지내며 조정의 위기관리에 있어 신속히 대처하였다. 백성을 위할 줄 알았으며 당색을 가지지 않고 지혜롭게 처신하여 당시 치열한 당쟁 속에서도 조화롭게 국정을 운영하였다.
설명 정태화(鄭太和, 1602~1673)는 1628년(인조 6)에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丙子胡亂)이 발발하자 원수부의 종사관(從事官)에 임명되어 도원수(都元帥) 김자점(金自貞) 휘하에서 청나라에 맞섰다. 토산(兎山)에서 도원수가 도망가 버린 급박한 상황에서, 정태화는 발 빠르게 대처하여 황해도에서 패잔병을 수습하여 항전하는 전과를 올렸다. 1637년(인조 15)에는 볼모로 간 소현세자(昭顯世子)를 모시고 심양(瀋陽)에 갔다가 이듬해 귀국하였으며 그해 6월에 토산에서의 공을 평가받아 호령안찰사(湖嶺按察使)로 부임하였다. 이 때 명나라와의 밀약이 청나라에 탄로 나자, 급히 봉황성(鳳凰城)으로 가서 청나라의 협박을 막았다. 또 1644년(인조 22) 소현세자가 죽자 봉림대군(鳳林大君)의 세자책봉을 반대하고 소현세자의 아들로서 적통을 계승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효종(孝宗, 봉림대군)이 즉위한 뒤 우의정·좌의정·영의정을 지냈다. 20년간 5차례나 영의정을 지내며 효종과 현종을 보필하고 1671년(현종 12)에 70세로 기로소(耆老所, 조선시대 연로한 고위 문신(文臣) 출신자들의 예우 차원에서 설치한 관서)에 들었다. 1673년(현종 14) 72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현종은 정태화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며 3년 동안 늠록(廩祿)과 제수를 내리도록 특명하였다. 그 뒤 현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익헌(翼憲)이었다가 충익(忠翼)으로 고쳐졌다. 저서로는 《양파유고(陽坡遺稿)》가 있다. 정태화는 늘 국익에 앞장서서 국사를 자기 일처럼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대동법을 확대시행 하도록 하였고 진휼청(賑恤廳)을 상설해 기근과 질병으로부터 백성을 구제하도록 하였다. 또한 흉년이 발생하자 관리의 월급을 삭감하자고 주장하여 조정에 대한 백성들의 신뢰를 회복하였다. 예송논쟁(禮訟論爭) 때에는 노론과 남인의 견해를 치우치지 않게 절충하여 국정을 운영하였다. 특히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의 북벌론에 대해 현실성이 없다고 여겼으나 성실히 응대하여 송시열을 등용한 임금의 뜻을 존중하고 송시열을 따르는 사림들을 포용하였다. 정태화는 병자호란으로 혼란했던 정국을 탁월한 문제해결 능력으로 운영하며 나라를 안정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역사정보 1602 출생 1651 영의정 임명 1671 기로소에 들어감 1673 사망
시대분류 조선/1602~1673
주제분류 문화/인물/기타
지번주소
도로명주소 서울특별시 중구
지역 서울특별시 중구
시작일(발생일)
인물 1602년~167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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