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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상세
관리정보 JGH_001074 / 정여창
* 명칭 정여창 이명칭
개요 조선 초기의 문신 정여창(鄭汝昌, 1450~1504)의 본관은 하동(河東), 자는 백욱(伯勗), 호는 일두(一蠹)·수옹(睡翁)이다. 성리학의 대가로 경사(經史)에 통달했으나, 무오사화(戊午史禍)에 연루되어 귀양 갔다가 그곳에서 사망했다. 정구(鄭逑)의 《문헌공실기(文獻公實記)》에 그 유집(遺集)이 전한다.
설명 정여창(鄭汝昌, 1450~1504)은 증한성부좌윤(贈漢城府左尹) 정육을(鄭六乙)의 아들로 1450년 경상남도 함양(咸陽)에서 출생하여 현재의 서울특별시 중구 회현동1가에 해당하는 지역에서 살았다. 1467년(세조 13) 부친 정육을이 이시애(李施愛)의 난에 병마우후(兵馬虞候)로 출전하여 전사하자 정여창은 직접 부친의 시신을 찾아 장례를 치렀다. 이를 가상히 여긴 세조가 의주판관(義州判官)직을 제수하였으나 끝내 사양하였다. 이후 조선 전기 신진사림의 거두인 김종직(金宗直)의 문하에 들어가 김굉필(金宏弼) 등과 함께 성리학을 연구하였다. 22세 때부터는 성균관에 입학하여 성균관 유생이 되었다. 여러 차례 벼슬에 추천되었지만 학문연구에만 뜻이 있어 사양하였다. 1483년(성종 14)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성균관 상사(上舍)의 동렬(同列)에서 그를 이학(理學)으로 추천하였다. 정여창은 1486년(성종 17) 어머니가 죽자 3년 동안 예를 다해 시묘살이를 하였다. 그 뒤 지리산 진양의 악양(岳陽) 섬진나루에 집을 짓고 학문에 매진하다가, 1490년(성종 21) 윤취(尹就)에 의해 효행과 학식으로 천거되어 소격서참봉(昭格署參奉)이 되었다. 그해 별시(別試)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예문관검열(藝文館檢閱)을 거쳐 세자시강원설서(世子侍講院設書)가 되어 훗날 연산군이 되는 동궁을 가르쳤다.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가 일어나 김종직이 탄핵받자 정여창 또한 김종직의 문인으로 연루되었다. 정여창은 김일손(金馹孫)이 《성종실록(成宗實錄)》에 쓴 선왕을 비방하는 내용의 글에 대해 고하지 않았다는 죄로 함경도 종성(鍾城)으로 유배되었다. 1504년(연산군 10) 유배지에서 사망하였으며 죽은 뒤 부관참시(剖棺斬屍, 죽은 후에 생전의 죄가 드러나면, 무덤을 파헤쳐서 관을 쪼개고 송장의 목을 베는 형벌)되었다. 중종 때 우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선조 때 문헌공(文獻公)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저서로 《용학주소(庸學註疏)》《주객문답설(主客問答設)》《진수잡저(進修雜著)》 등이 있었으나 무오사화 때 모두 소실되었고, 지금은 정구(鄭逑)의 《문헌공실기(文獻公實記)》 속에 그 유집이 전한다.
역사정보 1450 경상도 함양 출생, 현재 중구 회현동1가에 해당하는 지역에 거주 1490 문과 병과 급제 1504 사망
시대분류 조선/1450~1504
주제분류 문화/인물/기타
지번주소
도로명주소 서울특별시 중구
지역 서울특별시 중구
시작일(발생일)
인물 1450년~150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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