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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상세
관리정보 JGH_001069 / 이지남
* 명칭 이지남 이명칭
개요 조선 중기의 효자로 이름 높은 이지남(李至男, 1529~1577)의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단례(端禮), 호는 영응선생(永膺先生)이다. 모친의 병간호를 하다가 건강이 악화되어 사망했다. 자손들 또한 충신·효자·효녀·절부·열녀로 이름이 나 정문이 서게 되었고, 인조는 특별히 ‘효자삼세(孝子三世)’라는 액자를 내렸다.
설명 이지남(李至男, 1529~1577)은 숭례문 밖 잠바위골(현 중구 순화동 203)에서 태어나 이곳에서 살았다. 어릴 때 익혔던 《소학(小學)》의 효에 관한 내용을 평생 몸소 실천하였다. 순창군수로 좌천된 부친을 따라 내려갔다가 순창에서 김인후(金麟厚)를 만나 제자가 되었다. 김인후는 효행과 충절 등을 중시하였으며, 이지남은 이러한 학문적 영향을 고스란히 이어받아 실천하는 데 힘썼다. 부친이 귀양지에서 사망하자 3년의 시묘살이 내내 이지남의 곡소리가 그치지 않았다고 할 만큼 그의 효행이 나라 안에 널리 알려졌다. 이러한 명성으로 1577년(선조 10)에는 학행이 있는 선비로 천거되어 소격서참봉(昭格署參奉)에 제수되었다. 그러나 같은 해 병환이 심해진 모친을 극진히 간호하다가 건강이 악화되어 그마저 사망하였다. 이지남은 이기직(李基稷)·이기설(李基卨) 두 아들과 시집 안 간 딸이 있었는데 이들도 효성이 지극하였다. 맏아들 기직과 딸 또한 아버지의 초상에 매우 슬퍼하다가 23세와 18세의 나이로 사망하여 효자의 명성이 자자하였다. 이지남의 모친 안씨와 이지남의 부인은 절부로서, 아들 기직과 기설, 그리고 딸이 모두 이지남과 함께 표창을 받아 한 집에 6개의 홍문(紅門)이 세워졌으며, 이에 감화된 인종은 ‘효자삼세(孝子三世)’라는 액자를 내려주었다. 홍문이란 충신·효자·열녀 등이 살던 마을 입구나 집 앞에 그 행실을 널리 알리고 장려하기 위해 국가에서 세운 붉은 문을 말한다. 이후 기설의 아들인 이돈오(李惇五)와 돈오의 아내 김씨, 그리고 기설의 둘째 아들인 이돈서(李惇敍)가 병자호란 때 강화에서 모두 순절하였으므로 이들이 모두 정려(旌閭)되어 이지남의 가문에는 8개의 홍문이 세워지게 되었다.
역사정보 1529 숭례문 밖 잠바위골(현 중구 순화동 203) 출생 1577 학행으로 천거되어 소격서 참봉에 임명 1577 사망
시대분류 조선/1529~1577
주제분류 문화/인물/기타
지번주소
도로명주소 서울특별시 중구
지역 서울특별시 중구
시작일(발생일)
인물 1529년~157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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