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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상세
관리정보 JGH_001068 / 이준경
* 명칭 이준경 이명칭
개요 조선 명종 때의 문신 이준경(李浚慶, 1499~1572)의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원길(原吉), 호는 동고(東皐)·남당(南堂)·홍련거사(紅蓮居士)·연방노인(蓮坊老人)이다. 벼슬은 영의정 및 영중추부사에 이르렀다. 1555년 도순찰사로 호남지방에 침입한 왜구를 물리쳤으며, 신진 사대부와 기성 사림 간의 알력을 조정하는 데 힘썼다. 죽을 때 붕당(朋黨, 조선 중기 이후 특정한 학문적·정치적 입장을 공유하는 양반들이 모여 구성한 정치 집단으로 여기서는 그 집단간의 정치적 다툼을 말함)이 있을 것을 예언하였다. 저서에 《동고유고(東皐遺稿)》《조선풍속(朝鮮風俗)》 등이 있다.
설명 이준경(李浚慶, 1499~1572)은 한성부 동부 연화방(현 종로구 연지동 일대)에서 태어나 찬샘골(현 중구 쌍림동·묵정동 일대)에서 거주하였다. 젊어서부터 선비들 사이에 명망이 있었고 강직하고 청렴하여 당시 사람들이 형 이윤경(李潤慶)과 함께 ‘이봉(二鳳)’이라 불렀다. 이연경(李延慶) 문하에서 성리학을 배우다가 29세에 성균관에 들어갔다. 1531년(중종 26)에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여 승문원에 들어갔다가 이듬해 홍문관 정자가 되었다. 기묘사화 때 화를 입은 사람들의 무죄를 주장하다가, 오히려 권신 김안로(金安老) 일파의 모함을 받아 파직되었다. 1537년(중종 32) 호조좌랑으로 복직하여 요직을 지냈다. 1555년(명종 10)에는 을묘왜란을 진압한 공으로 병조판서를 겸하였으며 승진을 거듭하여 1565년에 영의정에 올랐다. 이준경은 붕당(朋黨, 조선 중기 이후 특정한 학문적·정치적 입장을 공유하는 양반들이 모여 구성한 정치 집단으로 여기서는 그 집단간의 정치적 다툼을 말함)이 초래하던 시기에 각 붕당의 균형을 위해 노력하였다. 기묘사화로 화를 입은 조광조의 관작(官爵)을 추증하고 을사사화 때의 피해자들을 유배에서 방면시켜 관작을 회복해주었다. 이렇듯 이준경은 사화로 피해를 입은 선비들을 구하는 데 앞장서 많은 이들의 칭송을 받았다. 그러나 반면에 신진사류 등의 개혁논의를 억제하려는 보수적 입장을 견지하여 비판받기도 하였다. 1571년(선조 4) 영의정을 사임한 후 이듬해 사망했다. 그는 죽음에 앞서서 임금에게 상소를 올려 학문을 게을리하지 말 것과 위의(威儀)를 가지고 신하를 접견할 것, 군자와 소인을 분별해 등용할 것, 장차 붕당이 있을 것이니 이를 타파할 것 등을 진언하였다. 죽음을 앞두고서도 붕당에 의한 정국의 농단(壟斷, 이익이나 권력을 독차지함)을 가장 걱정한 것이다. 1590년(선조 23), 광국원종공신(光國原從功臣) 1등에 추록되었고, 1602년(선조 35)에는 청백리에 지정되었다. 시호는 충정(忠正)이며, 저서로는 《동고유고(東皐遺稿)》《조선풍속(朝鮮風俗)》 등이 있다.
역사정보 1499 한성부 동부 연화방(현 종로구 연지동 일대)출생, 찬샘골(현 중구 쌍림동·묵정동 일대) 거주 1531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 1572 사망
시대분류 조선/1499~1572
주제분류 문화/인물/기타
지번주소
도로명주소 서울특별시 중구
지역 서울특별시 중구
시작일(발생일)
인물 1499년~157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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