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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상세
관리정보 JGH_001067 / 이정암
* 명칭 이정암 이명칭
개요 조선 중기의 문신 이정암(李廷馣, 1541~1600)의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중훈(仲薰), 호는 사류재(四留齎)·퇴우당(退憂棠), 시호는 문혜(文惠)이다. 두 차례의 왜란에서 의병을 모집하여 연안성(延安城)·수양산성(首陽山城)을 지켜냈다. 이 공으로 월천부원군(月川府院君) 및 좌의정에 추증되었다.
설명 이정암(李廷馣, 1541~1600)은 한성부 서부 반석방 한림동(현 중구 중림동)에 살았다. 1558년(명종 13)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 1561년(명종 16)에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정자(正字)가 되었다. 이후 검열(檢閱)·성균관전적(典籍)·공조(工曹)·예조(禮曹)·병조(兵曹)의 좌랑(佐郞) 등을 역임하였으며, 전라도도사·함경도도사·경기도도사를 지내고 병조정랑(兵曹正郞)으로 전임되었다. 1571년(선조 4) 예조정랑(禮曹正郞)·지평(持平)으로 춘추관(春秋館)의 직책을 겸하고 《명종실록(明宗實錄)》 편찬에 참여하였다. 이듬해에 성균관사예(司藝)에 제수되었다. 양주(楊洲)에 목사(牧使)로 부임하여 향교와 도봉서원을 중수했으며 대동법을 실시하고 번거로운 부역을 없애는 등 치적을 쌓았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국사를 망친 책임을 느껴 자진(自盡)하려 목을 매었으나 목숨을 구해주는 이가 있어 죽지 못하고 뒤늦게 왕을 호종하였다. 이 무렵 마침 개성유수(開城留守)를 지냈던 아우 이정형(李廷馨)과 함께 개성을 수비하였는데 개성이 함락되자 황해도초토사(黃海道招討使)로 의병을 모집하여 활약하였다. 연안성(延安城)을 수비하던 중 왜장 구로다(黑田長政)가 이끄는 왜군 6,000여 명을 대파하였고, 그 공으로 황해도관찰사 겸 순찰사가 되었다. 1596년(선조 29)에는 충청도관찰사로 이몽학(李夢鶴)의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웠고,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해서초토사(海西招討使)로 수양산성(首陽山城)을 지켰다. 난이 끝난 후 사직하고 경기도 풍덕(豊德)으로 은퇴하여 시문을 지으며 소일하였다 1604년(선조 37)에 연안성(延安城) 수비의 공으로 선무공신(宣武功臣) 2등으로 월천부원군(月川府院君)에 추봉되고 좌의정(左議政)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충목(忠穆)이다. 저서로는 《상례초(喪禮抄)》《독이초(讀易抄)》《왜변록(倭變錄)》《서정일록(西征日錄)》 등이 있다.
역사정보 1541 출생, 한성부 반석방 한림동(현 중구 중림동) 거주 1561 문과 병과 급제 1600 사망
시대분류 조선/1541~1600
주제분류 문화/인물/기타
지번주소
도로명주소 서울특별시 중구
지역 서울특별시 중구
시작일(발생일)
인물 1541년~160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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