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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상세
관리정보 JGH_001066 / 이원익
* 명칭 이원익 이명칭
개요 조선 중기의 문신 이원익(李元翼, 1547~1643)의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공려(公勵), 호는 오리(梧里),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1569년(선조 2)에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한 후 우의정·영의정을 지냈다. 임진왜란 때 대동강 서쪽을 잘 방어하여 호성공신(扈聖功臣)이 되었으며, 대동법을 시행하여 공부(貢賦)를 단일화하였다. 저서에 《오리집(梧里集)》《오리일기(梧里日記)》 등이 있다.
설명 이원익(李元翼, 1547~1643)은 경기도 금천현(현 경기도 광명시) 출생으로 1564년(명종 19)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1569년(선조 2)에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다. 이듬해 승문원부정자(承文院副正字)가 되고, 이어 정자(正字)·저작겸봉상사직장(著作兼奉常寺直腸)을 역임하였으며, 1573년(선조 6)에는 성균관전적이 되었다. 그해 성절사(聖節使) 권덕여(權德與)의 질정관(質正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온 후 호조·예조·형조의 좌랑을 거쳐 이듬해에는 황해도도사(黃海道都事)에 제수되었고 여러 관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조판서로서 평안도도순찰사의 직무를 띠고 왕의 피난길을 선도하는 한편, 김명원(金命元)을 도와 군의 기강을 확립하였다. 평양이 함락되자 정주로 가서 군졸을 모집하고 관찰사 겸 순찰사가 되어 왜병 토벌에 전공을 세웠다. 1593년에는 명나라 장수 이여송(李如松)과 합세하여 평양을 탈환하였으며, 그 공으로 숭정대부(崇政大夫)에 봉해졌다. 1595년(선조 28) 명나라 장수 정응태(丁應泰)가 양호(楊鎬)를 중상모략한 사건이 발생하자 영의정 유성룡을 대신해 진진변무사(陳秦辨誣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원익은 이때의 공로로 영의정에 제수되었으나 유성룡이 이이첨 등의 공격을 받고 사직 당하자, 이를 변호하는 상소를 올리고 자신도 사직하였다. 1600년(선조 33)에 좌의정을 거쳐 사도 도체찰사에 임명되어 영남과 서북지방을 순무하였다. 1604년(선조 37)에 호성공신 2등으로 완평부원군(完平府院君)에 봉해졌다. 1608년(광해군 1) 영의정에 중임되었으며 이때 민생안정을 위해 대동법을 경기도에 실시하였다. 광해군이 임해군·영창대군을 처형하려 하자 이를 극력(極力) 반대하여 유배되었고, 1623년(인조 1) 인조반정으로 영의정에 제수된 뒤에는 오히려 광해군의 사사를 목숨을 걸고 반대하기도 했다. 이듬해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인조를 충청도 공주(公州)까지 호종하였으며,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난 뒤에는 세자를 전라도 전주(全州)로 시종하였다. 말년에 벼슬에서 물러난 뒤에는 학문연구와 후학양성으로 여생을 보냈는데, 문인으로는 허목(許穆)·윤휴(尹鑴) 등이 있다. 서민적인 인품으로 문장에 뛰어났으며, ‘오리정승(梧里政丞)’이라 하여 많은 일화가 전한다. 청백리에 지정되었으며 인조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저서로는 《오리집(梧里集)》《속오리집(續梧里集)》《오리일기(梧里日記)》가 있다.
역사정보 1547 경기도 금천현(현 경기도 광명시) 출생 1569 문과 급제 1600 완평부원군으로 봉해짐 1643 사망
시대분류 조선/1547~1643
주제분류 문화/인물/기타
지번주소
도로명주소 서울특별시 중구
지역 서울특별시 중구
시작일(발생일)
인물 1547년~164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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