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구역사문화자원Database Contents

역사문화자원

  • home >
  • 역사문화자원
  • 수정

 

정보 상세
관리정보 JGH_001065 / 이안눌
* 명칭 이안눌 이명칭
개요 조선 인조 때의 문신 이안눌(李安訥, 1571~1637)의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자민(子敏), 호는 동악(東岳)이며 시호는 문혜(文惠)이다. 진사 이동(李洞)의 아들로 예조참판을 지냈으며, 시문에 능하고 글씨도 잘 썼다. 저서에 《동악집(東岳集)》이 있다.
설명 이안눌(李安訥, 1571~1637)은 한성부 먹절골(현 중구 묵정동)에 거주하였다. 1588년(선조 21) 18세에 진사시에 1등으로 합격하였으나 동료들의 모함을 받자 과거를 포기하고 권필(權韠)·윤근수(尹根壽)·이호민(李好閔) 등과 더불어 동악시단(東岳詩壇)을 만들어 남산 기슭에서 시를 지으며 풍류를 즐겼다. 29세가 되던 해인 1599년(선조 32) 다시 과거에 나아가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承文院)에 보임되었다. 이후 병으로 사직한 기간을 제외하고는 여러 언관직을 두루 거치다가 좌부승지·강화부사를 역임했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으로 예조참판이 되었으나 중상모략을 받아 사직하였다. 이괄의 난이 평정된 후에는 이를 방관했다는 이유로 함경도 북변(北邊)으로 유배되었다가 1627년(인조 5),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사면되었다. 1636년(인조 14) 다시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병든 몸으로 임금을 호종하여 남한산성까지 갔다가 환도(還都) 후 병세가 악화되어 사망하였다. 어가를 수행한 공로로 인해 숭록대부·의정부좌찬성 겸 홍문관대제학·예문관대제학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문혜(文惠)이다. 저서로는 《동악집(東岳集)》 26권이 전하는데, 여기에 4,379수라는 방대한 양의 시를 남기고 있다. 특히 당시(唐詩)에 능해 이태백에 비유되었으며 글씨 또한 명필로 알려져 있다. 특히 작품 속에 백성들의 생활상을 사실적으로 표현하고 있어 당시의 상황을 이해하는 데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역사정보 1571 출생, 한성부 먹절골(현 중구 묵정동) 거주 1599 문과 급제로 승문원 보임 1637 사망
시대분류 조선/1571~1637
주제분류 문화/인물/기타
지번주소
도로명주소 서울특별시 중구
지역 서울특별시 중구
시작일(발생일)
인물 1571년~1637년

 li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