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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상세
관리정보 JGH_001063 / 이산해
* 명칭 이산해 이명칭
개요 조선 선조 때의 문신 이산해(李山海, 1539~1609)의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여수(汝受), 호는 아계(鵝溪)·종남수옹(終南睡翁)이다. 1561년(명종 16)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여 영의정에 올랐으며, 문장과 서화에 능했는데, 특히 대자(大字)와 산수화에 뛰어났다. 문집에 《아계유고(鵝溪遺稿)》가 있다.
설명 이산해(李山海)는 1539년(중종 34) 서울 황화방(皇華坊, 현 중구 정동)에서 태어났다. 숙부인 지함(之菡)에게 학문을 배웠다. 7살에 문장을 지을 정도로 총명하여 신동으로 불렸고, 1549년(명종 4) 과장(科場)에 나아가 1등을 한 적도 있다. 1558년(명종 13) 사마시에 합격하였고 1560년 알성시 수석, 이듬해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다. 명종의 명을 받아 경복궁대액(景福宮大額)을 쓰고 이후 승진을 거듭하였다. 사가독서를 마친 후 1570년(선조 3), 동부승지로 승진하여 5년간 대사성·예조참의 등을 차례로 역임하였다. 1575년(선조 8) 부친의 상을 당해 사직하였다가 상이 끝난 후 병조참판 등을 두루 지내고, 이듬해 이조판서로 전임하였으나 모친의 상을 맞아 사직하였다. 상을 마친 뒤 1583년(선조 16), 우찬성으로 기용되었다가 1588년(선조 21) 우의정에 제수되었다. 이 무렵 동인이 북인과 남인으로 갈라지자 북인의 영수가 되어 정권을 장악하였다. 1589년(선조 22) 좌의정을 거쳐 곧 영의정으로 승진하였다. 같은 해에 정여립의 모반사건인 기축옥사(己丑獄死)가 일어나자 이에 연루될 위기에 처했으나 선조의 보살핌으로 모면하였고, 종계변무(宗系辨誣)의 공으로 광국공신 3등에 책록됨과 동시에 아성부원군(鵝城府院君)에 봉해졌다. 1591년(선조 24) 정철을 탄핵하여 유배시키고, 이와 함께 같은 서인이었던 윤두수(尹斗壽)·윤근수(尹根壽) 등도 제거하여 동인의 집권을 확고하게 하였다.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왕에게 도성을 떠날 것을 권유하였고 이때 왕을 호종하였다. 그러나 임진왜란이 끝난 뒤 국왕으로 하여금 도성을 떠나도록 했다는 대간들의 추궁으로 탄핵받아 3년간 강원도 평해(平海)로 유배되었다. 1595년(선조 28) 귀양에서 풀려나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로 복직되었다. 1599년(선조 32) 다시 북인의 영수가 되어 영의정(領議政)에 올랐으나 1602년(선조 34년) 자리에서 물러났다. 이후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와 기로소(耆老所)에서 대신을 지냈다. 선조가 승하하자 원로대신이 되어 국정을 맡았다가 곧 서울에서 사망했다. 문장에 능하여 선조 때 문장팔가(文章八家)로 꼽혔다. 아울러 서화에도 재질이 있었으며, 특히 대자(大字)와 산수화에 뛰어났다. 오랜 관직생활에도 청탁을 받지 않고 청빈한 생활을 한 것으로 전한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며, 문집으로 《아계유고(鵝溪遺稿)》가 있다.
역사정보 1539 한성부 황화방(현 중구 정동) 출생 1561 식년문과 병과 급제 1589 아성부원군으로 봉해짐 1609 사망
시대분류 조선/1539~1609
주제분류 문화/인물/기타
지번주소
도로명주소 서울특별시 중구
지역 서울특별시 중구
시작일(발생일)
인물 1539년~160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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