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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상세
관리정보 JGH_001060 / 이경여
* 명칭 이경여 이명칭
개요 조선 중기의 문신 이경여(李敬輿, 1585~1657)의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직부(直夫)이며, 호는 백강(白江)·봉암(鳳巖)이다. 세종(世宗)의 7대손으로 목사(牧使) 이수록(李綏祿)의 아들이다. 병자호란을 예언하였으며, 심양(瀋陽)에 억류되었다가 세자와 함께 돌아왔다. 1650년(효종 1)에 영의정에 올랐다. 저서에 《백강집(白江集)》이 있다.
설명 이경여(李敬輿)는 현재 중구 남산동3가 영화진흥공사 부근에 살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1601년(선조 34), 사마시(司馬試)를 거쳐 진사가 되었고 1609년(광해군 1)에 증광문과 을과(乙科)에 급제하였다. 1611년(광해군 3), 검열(檢閱)이 되었으나 정치에 실망하여 외직인 현감(縣監)을 자청했고, 그 뒤 벼슬을 버리고 낙향했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다시 기용되어 부수찬·부교리를 지냈다. 이듬해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왕을 충청도 공주(公州)까지 호종(扈從)하였다. 이어 체찰사(體察使) 이원익(李元翼)의 종사관이 되었고 겸문학(兼文學)이 되어 세자(世子)를 시강하였다. 1630년(인조 8)에는 부제학·청주목사·좌승지·전라도관찰사를 역임했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자 왕을 남한산성으로 호종했고, 이듬해 경상도관찰사·이조참판·형조판서 등을 역임했다. 이조참판으로 대사성(大司成)을 겸임하면서 선비 양성의 방책을 임금에게 올렸다. 1642년(인조 20), 이계(李烓)가 이경여를 배청친명파(排淸親明派)로서 청나라 연호를 사용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밀고하자, 이 일로 청나라에 잡혀갔으나 조정에서 벌금을 내고 귀국하였다. 1644년(인조 22) 사은사로 청나라에 갔다가 과거의 일로 다시 억류되어 지내다가 세자를 따라 돌아온 뒤 영의정이 되었다. 1645년(인조 23) 소현세자(昭顯世子)가 죽자 인조는 세손이 있었음에도 소현세자의 동생 봉림대군(鳳林大君, 효종)을 세자로 정하였다. 이경여는 이에 불가하다는 의사를 강력히 주장하였다. 1646년(인조 24)에는 민회빈(愍懷嬪) 강씨(姜氏)의 사사(賜死)를 반대하다가 귀양을 갔으며, 효종이 즉위하자 특사로 풀려나 다시 재상의 반열에 올랐다. 1657년(효종 8) 지병으로 자택에서 숨을 거두었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며, 저서로는 《백강집(白江集)》이 있다.
역사정보 1585 출생, 현재의 중구 남산동3가에 거주했던 것으로 추정 1609 증광문과 을과 급제 1657 사망
시대분류 조선/1585~1657
주제분류 문화/인물/기타
지번주소
도로명주소 서울특별시 중구
지역 서울특별시 중구
시작일(발생일)
인물 1585년~165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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