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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상세
관리정보 JGH_001059 / 윤황
* 명칭 윤황 이명칭
개요 조선 인조 때의 문신 윤황(尹煌, 1572~1639)의 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덕요(德耀), 호는 팔송(八松)·노곡(魯谷)이다. 성혼(成渾)의 사위이자 문인으로 성혼의 학통을 계승하는 수제자였다. 강직하고 절개가 있어 두 차례 호란을 겪는 동안 척화(斥和)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설명 윤황(尹煌)은 1572년(선조 5)에 한양(漢陽)의 저택에서 출생하여 남산 기슭(현재 중구 필동2가)에서 살았다. 1597년(선조 30) 알성문과(謁聖文科) 을과(乙科)에 급제하여 승문원부정자(承文院副正字)에 임명되었다. 이후 형조좌랑(刑曹佐郞)·병조좌랑(兵曹佐郞)·예조좌랑(禮曹佐郞) 등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다가, 1615년(광해군 7) 군자감정(軍資監正)으로 전직하였다. 1616년(광해군 8) 사돈인 해주목사(海州牧使) 최기(崔沂)가 남형죄(濫刑罪)로 투옥되자 이를 찾아간 것이 빌미가 되어 탄핵을 받아 파직 당하였다. 이후 충청도 이산(尼山)에서 은거하다가, 1623년(인조 1)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다시 등용되어 대사간(大司諫)·수찬(修撰)·동부승지(同副承旨)·이조참의(吏曹參議) 등을 역임했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丁卯胡亂)과 1636년 병자호란 때는 사간(司諫)으로서 척화(斥和)를 강력히 주장했으며, 척화신(斥和臣)으로 갈 것을 자청하였으나 허락되지 않았다. 환도(還都) 후 상소문 중에 불손한 구절이 있다 하여 영동(永同)으로 유배되었다가 곧 용서되어 1638년(인조 16) 이산으로 돌아왔으나 이듬해 병으로 사망하였다. 후세에 윤황은 사람됨이 강직하고 절개가 있었다고 평가받았다. 사후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저서로는 《팔송봉사(八松封事)》가 있다.
역사정보 1572 한성부 출생, 남산 기슭(현 중구 필동2가)에서 거주 1597 알성문과 을과 급제 1639 사망
시대분류 조선/1572~1639
주제분류 문화/인물/기타
지번주소
도로명주소 서울특별시 중구
지역 서울특별시 중구
시작일(발생일)
인물 1572년~163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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