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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상세
관리정보 JGH_001057 / 윤선거
* 명칭 윤선거 이명칭
개요 조선 중기의 학자 윤선거(尹宣擧, 1610~1669)의 본관은 파평, 자는 길보(吉甫), 호는 미촌(美村),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우계(牛溪) 성혼(成渾)의 외손으로 당색은 서인이었다. 병자호란 때 절개를 지키지 못한 것에 대한 속죄로 평생 관직에 뜻을 두지 않고 학자로서 연구에 매진하였다. 김집(金集)의 문인으로 예학의 대가였다.
설명 윤선거(尹宣擧)는 1610년(광해군 2)에 전라도 영광(靈光)에서 태어났고 현재의 중구 충무로 4가에 거주하였다. 1633년(인조 11), 생원·진사시에 합격하여 성균관(成均館)에 입학하였다. 1636년(인조 14), 청나라의 사신이 입국하자 명나라에 대한 의리를 지키기 위해 사신의 목을 베도록 상소하였다. 같은 해 12월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자 강화도로 피난하였다. 이곳에서 윤선거는 순절(殉節)하기로 마음먹었으나 부인만 자결하였고 본인은 평민 복장으로 탈출하였다. 난리가 끝난 후 평생에 걸쳐 수십 차례 부름을 받았으나 전쟁 중에 절개를 버리고 살아남은 것에 대한 속죄로 평생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다. 1642년에 충청도 이산(尼山)에서 김집(金集)의 문인이 되었다. 송시열(宋時烈)·윤휴(尹鑴)·윤선도(尹善道) 등과 친분을 쌓고 예학을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자의대비(慈懿大妃) 복상(服喪)문제로 남인인 윤휴와 서인인 송시열의 대립이 생겼다. 갈등이 이어져오다가 윤휴와의 주자경전주해(朱子經傳註解) 변개(變改) 문제에 대한 대립에서 윤휴의 입장도 어느 정도 수용하는 방향으로 변호를 하다가 송시열과의 관계가 소원해졌다. 1669년(현종 10) 송시열에게 남인과의 당쟁을 지양하고 그들을 등용할 것을 제안한 ‘기유의서(己酉擬書)’를 썼다. 하지만 이를 보내지 못하고 사망하자 아들 윤증(尹拯)이 대신 송시열에게 전달하였으나 수용되지 않았다. 이 일로 윤증과 송시열과의 관계까지 악화되어, 후에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분당하는 계기가 되었다. 1710년(숙종 36)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1711년(숙종 37) 문경(文敬)이란 시호를 받았다. 저서로는 《노서유고(魯西遺稿)》《가례원류(家禮源流)》《계갑록(癸甲錄)》 등이 있다.
역사정보 1610 전남 영광 출생, 현재의 충무로 4가에 거주 1633 생원·진사시에 합격 1636 관직을 버리고 학문연구에 매진 1669 사망
시대분류 조선/1610~1669
주제분류 문화/인물/기타
지번주소
도로명주소 서울특별시 중구
지역 서울특별시 중구
시작일(발생일)
인물 1610년~166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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