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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상세
관리정보 JGH_001053 / 성현
* 명칭 성현 이명칭
개요 조선 성종 때의 문신 성현(成俔, 1439~1504)의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경숙(磬叔), 호는 용재(慵齋)·부휴자(浮休子)·허백당(虛白堂)·국오(菊塢) 등이다. 《악학궤범(樂學軌範)》을 편찬하여 음악을 집대성하였고, 대표적 저서인 《용재총화(慵齋叢話)》는 조선 전기의 모습을 알 수 있는 역사적 자료로 높이 평가받고 있다.
설명 성현(成俔, 1439~1504)은 1439년(세종 21) 한성부 만리현(현 중구 중림동)에서 태어나 평생 서울에서 살았다. 1459년(세조 5)에 진사(進士)에 합격하고, 1462년(세조 8)에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여 예문관에 들어가 홍문관정자를 겸하였다. 이에 만족하지 않고 1466년(세조 12) 발영시(拔英試)에도 급제하여 박사로 등용되었다. 1468년(예종 1)에는 형 성임(成任)을 따라 명나라에 가는 길에 읊은 시를 모아 《관광록(觀光錄)》으로 엮었는데, 그 뛰어난 문장력에 중국인들도 탄복했다고 한다. 1475년(성종 6) 한명회(韓明澮)를 따라 두 번째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다음해 문과중시(文科重試)에 병과로 급제한 후 대사간이 되었다. 1485년(성종 16), 첨지중추부사로 천추사(千秋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온 뒤, 동부승지(同副承旨) 등을 역임하였다. 1488년(성종 19) 명나라 사신 동월(董越)과 왕창(王敞)을 맞아 접대연에서 서로 시를 주고받았는데 중국 사신들이 성현의 뛰어난 시재(詩才)에 탄복해 마지않았으며, 그 후 조선을 다녀오는 자가 있으면 반드시 그의 안부를 물었다고 한다. 1490년(성종 24), 장악원 제조로 고려가사 중 〈쌍화점(雙花店)〉·〈이상곡(履霜曲)〉·〈북전(北殿)〉 등의 내용을 개작하였다. 1493년(성종 24) 예조판서와 장악원 제조를 겸직하면서 왕명에 따라 유자광(柳子光)·신말평(申末平) 등과 함께 의궤(儀軌)와 악보를 정리하여 《악학궤범(樂學軌範)》을 편찬하였다. 이는 우리나라 음악사상 가장 방대하고도 귀중한 업적이었다. 1497년(연산군 3), 한양부판윤이 되었으며 그 후 공조판서로 대제학을 겸하였고 이어 좌찬성에까지 이르렀다가 1504년(연산군 10)에 사망하였다. 사망 후 수개월 만에 갑자사화(甲子士禍)가 일어나 부관참시(剖棺斬屍, 죽은 후에 생전의 죄가 드러나면, 무덤을 파헤쳐서 관을 쪼개고 송장의 목을 베는 형벌)되었다가 중종 때 신원되었다. 시호는 문대(文戴)이다. 저서로는 《악학궤범》《용재총화》《부휴자담론(浮休子談論)》《주의패설(奏議稗說)》《금낭행적(錦囊行跡)》 등이 있다. 이 중에서도 《용재총화》는 고려부터 조선에 이르기까지 풍속과 설화 등을 담고 있어 역사적인 자료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역사정보 1439 한성부 만리현(현 중구 중림동) 출생 1462 식년문과 급제 1466 발영시 급제 1493 《악학궤범》 편찬 1504 사망
시대분류 조선/1439~1504
주제분류 문화/인물/기타
지번주소
도로명주소 서울특별시 중구
지역 서울특별시 중구
시작일(발생일)
인물 1439년~150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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