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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상세
관리정보 JGH_001048 / 박승종
* 명칭 박승종 이명칭
개요 박승종(朴承宗, 1562~1623)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광해군(光海君) 때에 우의정과 좌의정, 영의정을 두루 거친 인물이다. 본관은 밀양(密陽)이며, 자는 효백(孝伯), 호는 퇴우당(退憂堂)이다. 그는 인목대비 폐모론을 적극 반대하였으며,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아들과 함께 목을 매어 자결하였다.
설명 박승종(朴承宗, 1562~1623)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광해군(光海君) 때에 영의정을 역임한 인물이다. 박승종은 1586년(선조 19)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로 급제한 후, 봉교(奉敎)·부제학(副提學)·병조판서(兵曹判書)·좌의정(左議政)·영의정(領議政) 등의 주요 관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게다가 아들 박자흥(朴子興)의 딸이 광해군의 세자빈(世子嬪)으로 간택되어 밀양부원군(密陽府院君)으로 봉해져 부족함 없는 권세를 누렸다. 그러나 가문의 번영이라는 사적인 욕심에 따르지 않고, 대의(大義)에 입각하여 광해군의 인목대비(仁穆大妃) 폐위를 적극적으로 반대하였다. 1612년(광해군 4) 광해군이 인목대비를 제거하기 위해 대비가 거처하던 경운궁(慶運宮)에 사람을 난입시키는 사건이 발생하자, 박승종은 죽음을 무릅쓰고 인목대비를 보호하였다. 이후에도 인목대비를 지키려는 그의 노력은 계속 이어져, 1617년(광해군 9) 인목대비 폐모론(廢母論)이 본격적으로 대두되자 폐모 반대를 앞장서 주장하였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광해군이 축출되자 아들 박자흥과 함께 목을 매어 자살하였다. 광해군과 사돈 집안이라는 이유로 인조반정이 성공한 뒤 관작(官爵)이 삭탈되고 가산이 몰수되었다가 뒷날 신원되었다. 서울특별시 중구 필동에 “읍백당 터(挹白堂址)”라고 적힌 표지석이 설치되어 있는데, 이곳이 바로 박승종의 집터이다. 읍백당은 박승종의 둘째 아들인 박자응(朴自凝)이 지은 당호(堂號)로, 읍백(挹白)의 백(白)은 인목대비가 거처하던 서궁(西宮)을 의미한다. 즉 박승종이 인목대비를 지키려 했던 마음을 아들이 이어, ‘읍백’이라는 당호로 표현한 것이다. 박자응은 인조반정 이후 유배형에 처해졌으나 훗날 이 당호가 근거가 되어 신원되었다.
역사정보 1562 출생 1586 별시문과에 병과 급제 1623 인조반정으로 인하여 자살
시대분류 조선/1562~1623
주제분류 문화/인물/기타
지번주소
도로명주소 서울특별시 중구
지역 서울특별시 중구
시작일(발생일)
인물 1562년~162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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