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구역사문화자원Database Contents

역사문화자원

  • home >
  • 역사문화자원
  • 수정

 

정보 상세
관리정보 JGH_001046 / 남궁억
* 명칭 남궁억 이명칭
개요 남궁억(南宮檍, 1863~1939)은 대한제국기와 일제강점기에 활동한 독립운동가이자 교육자, 언론인이다. 본관은 함열(咸悅), 자는 치만(致萬), 호는 한서(翰西)로 서울의 정동(貞洞) 왜송골(倭松洞)에서 태어났다. 독립협회(獨立協會) 창립과 《황성신문(皇城新聞)》 창간을 주도하였고, 현산학교(峴山學校)를 설립하였다. 기독교계 독립운동 비밀결사인 십자당(十字黨)을 조직하여 활동하다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석방된 뒤 고문 후유증으로 사망하였다.
설명 남궁억(南宮檍, 1863~1939)은 구한말과 일제강점기에 활동한 독립운동가이자 교육자·언론인으로, 독립협회(獨立協會)를 창립하고, 《황성신문(皇城新聞)》을 창간하였다. 그는 1883년(고종 20)에 외국어 통역관 양성을 목적으로 설립된 통변학교(通辯學校)에 입학하여, 1884년(고종 21)에 최우등으로 졸업하였다. 이후 내부(內部) 주사(主事)와 칠곡군수를 역임하였다. 1894년(고종 31) 갑오경장(甲午更張) 직후 남궁억은 내부 토목국장에 임명되어 서울 종로·정동·육조·남대문 일대의 도로를 정비하고, 파고다 공원을 조성하는 등 현재 서울 도심의 모습을 갖출 수 있도록 하였다. 1896년(고종 33)에 명성왕후가 시해되자 신변에 위협을 느낀 고종(高宗)이 러시아 공관으로 몸을 피한 아관파천(俄館播遷)이 일어나자 관직을 사임한 뒤 독립협회(獨立協會)를 창립하고, 《황성신문(皇城新聞)》을 창간하여 민족사상을 고취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이후 대한협회(大韓協會)를 창립하고 기관지로 《대한협회월보》와 《대한민보(大韓民報)》를 발행하면서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는 등 구국(救國)활동에 주력하였다. 한편, 1907년 남궁억은 양양군수로 재직하면서 동헌(東軒) 뒷산에 현산학교(峴山學校)를 세우고, 교육잡지인 《교육월보(敎育月報)》를 발행하였다. 1910년에는 배화학당(培花學堂)에서 교사로 재직하였으며, 1912년 상동청년학원(尙洞靑年學院)의 원장을 지내기도 하였다. 1919년에는 요양을 위해 강원도 홍천으로 거주지를 옮긴 뒤 모곡학교(牟谷學校)를 설립하였다. 이즈음 일제가 민족정신의 말살을 목적으로 일장기와 벚꽃을 보급하고 장려하자, 남궁억은 이에 항거하여 모곡학교에 무궁화묘포를 만들고, 무궁화 보급운동을 전국에 걸쳐 전개하였다. 이때 그가 지은 노래인 〈무궁화동산〉이 민간에 널리 유행하였다. 남궁억은 1933년 기독교계 독립운동 비밀결사인 십자당(十字黨)을 조직하여 활동하다 일본 경찰에 적발되어 투옥되었다. 그리고 1939년 석방된 지 4년 만에 고문 후유증으로 사망하였다. 1962년 남궁억에게 대통령 표창이 추서되었으며, 1977년에 건국훈장 국민장이 수여되었다.
역사정보 1863 서울 정동 출생 1884 통변학교 졸업 1894 서울 도심 거리 정비 및 파고다 공원 건립 1939 고문후유증으로 사망 1962 대통령 표창 추서 1977 건국훈장 국민장 추서
시대분류 조선, 일제강점기/1863~1939
주제분류 문화/인물/기타
지번주소
도로명주소 서울특별시 중구
지역 서울특별시 중구
시작일(발생일)
인물 1863년~1939년

 li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