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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상세
관리정보 JGH_001043 / 김장생
* 명칭 김장생 이명칭
개요 김장생(金長生, 1548~1631)은 조선 중기의 학자이자 문신으로, 중구 정동(貞洞) 부근에서 출생하였으며, 자는 희원(希元), 호는 사계(沙溪), 본관은 광산(光山)이다. 김장생은 관직보다는 학문에 힘을 쏟아 조선시대 예학(禮學)의 체계를 잡는데 크게 기여하였고, 기호학파를 이룩하여 많은 후학을 양성하였다.
설명 김장생(金長生, 1548~1631)은 조선 중기의 학자이자 문신으로, 학문에 힘을 쏟아 예학(禮學)의 체계를 세워 기호학파를 형성한 인물이다. 본관이 광산(光山)으로 자는 희원(希元), 호는 사계(沙溪)이다. 대사헌 김계휘(金繼輝)의 아들이며, 중구 정동(貞洞) 부근에서 출생하였다. 김집(金集)이 그의 아들이다. 김장생은 송익필(宋翼弼)과 이이(李珥)의 문하로 과거(科擧)보다는 학문의 정진에 힘을 쏟았다. 1578년(선조 11) 31세에 유일(遺逸)로 추천되어 참릉참봉이 되고, 이후 1613년(광해군 5)까지 안성(安城)군수·익산군수·철원(鐵原)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1613년(광해군 5) 계축옥사(癸丑獄事)에 연루되었으나 무혐의로 풀려났고, 이후 충청도 연산(連山)으로 낙향하여 예학 연구에 몰두하였다. 이후 1623년(인조 1)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서인이 정권을 잡자 75세의 나이에 다시 벼슬에 나아갔으나 병으로 곧 낙향하였다. 이어 동지중추부사 등에 제수되었고 1627년(인조 5) 정묘호란(丁卯胡亂) 때 양호호소사(兩湖號召使)가 되어 의병을 모집하였다. 이듬해 형조참판이 되었으나 병으로 사직하였다. 김장생은 예학을 깊이 연구하여 아들 김집에게 이를 계승시켜 조선 예학의 태두로 예학파의 주류를 형성하였다. 그의 문하로는 아들 김집을 비롯하여 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이유태(李惟泰) 등이 있었고, 서인을 중심으로 한 기호학파를 이룩하여 조선 유학계에 있어서 영남학파와 쌍벽을 이루었다. 그 자신은 요직을 많이 거치지 않았으나 인조반정 이후 서인의 영수 자격으로 당시 정국에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1631년(인조 9) 연산의 자택에서 83세로 사망하였다. 1657년(효종 8)에는 영의정에 추증되고 문원(文元)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저서로는 《상례비요(喪禮備要)》《가례집람(家禮輯覽)》《전례문답(典禮問答)》《근사록석의(近思錄釋疑)》《경서변의(經書辨疑)》《사계전서(沙溪全書)》《사계유고 (沙溪有故)》 등이 있다. 중구 덕수궁길 서울시립미술관으로 올라가는 길에 ‘김장생, 김집선생 생가터’표지석이 있다.
역사정보 1548 중구 정동 부근 출생 1578 참릉참봉을 지냄 1596 충청도 연산으로 낙향 1631 83세의 나이로 사망 1657 영의정 추증, 시호를 내려 받음
시대분류 조선/1548~1631
주제분류 문화/인물/기타
지번주소
도로명주소 서울특별시 중구
지역 서울특별시 중구
시작일(발생일)
인물 1548년~163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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