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구역사문화자원Database Contents

역사문화자원

  • home >
  • 역사문화자원
  • 수정

 

정보 상세
관리정보 JGH_001042 / 김육
* 명칭 김육 이명칭
개요 김육(金堉, 1580~1658)은 조선 중기의 개혁가이자 정치가로 본관은 청풍(淸風)이며, 자는 백후(伯厚), 호는 잠곡(潛谷)이다. 김육은 백성들의 구제를 위해 수레·수차를 이용하고, 대동법(大同法)을 시행하는 등 현실적인 개혁정치를 펼친 인물이다. 한양 마포에서 출생하였으며, 기묘사화(己卯士禍)로 가문이 기울어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지만 뛰어난 재능으로 영의정에 올랐다.
설명 김육(金堉, 1580~1658)은 조선 중기의 개혁가이자 정치가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국가의 초석이 흔들리고 백성들이 도탄에 빠져 있던 국난의 시기를 현실 개혁을 통해 타개하려 했던 인물이다. 본관이 청풍(淸風)으로 자는 백후(伯厚), 호는 잠곡(潛谷),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김육은 1605년(선조 38)에 사마시(司馬試)에 급제하여 진사가 되었으나, 계축옥사(癸丑獄事)이후 관직을 단념하고 잠곡(潛谷)으로 낙향하여 농사를 지었다. 김육은 어린 시절을 불우하게 보냈다. 그의 가문은 고조부 김식(金湜)이 1519년(중종 14) 기묘사화(己卯士禍)에 연루되면서 1568년(선조 1)까지 과거에 응시할 자격을 박탈당하였다. 조부 김비(金棐)와 아버지 김흥우(金興宇)대에 이르러 가문의 부흥을 위해 노력하였지만,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壬辰倭亂)이 발발하면서 피난길에 올랐고 그 과정에서 아버지 김흥우가 사망하여 15세에 가장이 되었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서인이 집권하게 되면서 유일(遺逸)로 추천되어 조정에 나가 의금부 도사가 되었고, 1624년(인조 2) 증광문과(增廣文科)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정언(正言)에 임명되었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丁卯胡亂) 이후 평안도 안변도호부사(安邊都護府使)로 임명되어 청나라의 침략에 대비하였고, 두 번의 호란을 겪은 후 1638년(인조 16) 충청도관찰사로 부임하였다. 충청도관찰사로 있을 때 대동법(大同法) 시행을 건의하였다. 이듬해에 동부승지(同副承旨)·대사성(大司成)·부제학 등을 거쳐 1643년(인조 21)에는 한성부 우윤·도승지가 되고 소현세자(昭顯世子)가 심양(瀋陽)에 볼모로 잡혀가자 보양관(輔養官)으로 수행, 귀국하여 우부빈객(右副賓客)이 되었다. 1649년(인조 27) 인조의 사망으로 벼슬을 물러나려 하였으나, 효종(孝宗)의 반려로 특진하여 우의정이 되었다. 김육은 대동법을 충청도로 확대 시행하기 위해 이를 건의하였으나, 김집(金集)을 중심으로 한 산당(山黨)세력의 격렬한 반대에 부딪쳐 실패하였다. 진향사(進香使)로 청나라에 다녀온 후, 1651년(효종 2) 십전통보(十錢通寶)의 주조를 건의하여 우리나라 최초의 고액동전(高額銅錢)을 유통하고 같은 해 끝내 충청도 지역에서 대동법 실시에 성공하였다. 1658년(효종 9) 한성부 회현방 자택에서 사망하였다. 그의 사후에는 아들 김좌명(金左明)에 의하여 전라도·경상도·황해도에 차례로 대동법이 실시되었다. 김육은 대동법 외에도 시헌력(時憲曆)의 제정을 건의하였고, 수레와 관개에 수차의 사용을 제안하는 등 조선시대 최고의 개혁자 중의 한 명이었다. 그의 경제학은 실학(實學)의 선구자인 유형원(柳馨遠)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저서로는 《잠곡필담(潛谷筆談)》《유원총보(類苑叢寶)》《송도지(松都誌)》 《팔현전(八賢傳)》《해동명신록(海東名臣錄)》 등이 있다.
역사정보 1580 한양 마포 출생 1605 진사시 급제 1624 증광문과에 장원급제 1638 대동법 시행 건의 1650 영의정이 된 후 대동법 시행 재건의 1652 충청도에 대동법 시행 1658 한성부 회현방 자택에서 사망
시대분류 조선/1580~1658
주제분류 문화/인물/기타
지번주소
도로명주소 서울특별시 중구
지역 서울특별시 중구
시작일(발생일)
인물 1580년~1658년

 li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