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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상세
관리정보 JGH_001036 / 강세황
* 명칭 강세황 이명칭
개요 강세황(姜世晃, 1713~1791)은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문인 서화가로 본관은 진주, 자는 광지(光之), 호는 표옹(豹翁)·노죽(路竹)·표암(豹菴) 등을 썼다. 서울 남부 남소동 출신으로 만년에는 남산 아래인 회현동, 종로구 동숭동 등지에서 살았다. 시·서·화의 삼절로 불렸으며, 식견과 안목이 뛰어난 사대부 화가로서 한국적인 남종문인화풍을 정착시키는 데 공헌하였다.
설명 강세황(姜世晃, 1713~1791)은 어려서부터 문장과 글씨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8세에 시를 짓고, 13~14세에 쓴 글씨를 얻어다가 병풍을 만드는 사람이 있을 정도였다. 그럼에도 과거에는 뜻이 없어 응하지 않고 글씨와 그림, 학문을 연마하며 젊은 시절을 보냈다. 1744년(영조 20) 가난이 심하여 처가가 있는 경기도 안산(安山)으로 이주하여 살면서도 이후 30년간 꾸준히 서화와 학문에 몰두하였다. 그러던 중 1773년(영조 49) 영조는 대대로 나라와 임금을 섬긴 집안이라 표창하며 당시 61세였던 강세황을 영릉참봉으로 관직에 진출시켰다. 이후 강세황은 1776년(영조 52) 기로과와 1778년(정조 2) 문과 정시에 장원을 하였고 꾸준히 순탄한 벼슬길을 걸었다. 강세황은 역대 서법에 대해 깊이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일생에 걸쳐 수없이 서예 수련을 쌓았다. 특히 그는 중국의 왕희지(王羲之)의 글씨를 근간으로 삼고, 조맹부(趙孟頫)의 서법을 연마하여 해서·행서·초서에서 일가를 이루었다. 그중에서도 강세황이 두드러지게 활동했던 분야는 단연 그림이었다. 그는 창작과 이론을 겸비한 사대부 서화가로서 남종문인화가 조선 후기의 주도적인 화풍으로 정착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남종문인화란 학문과 교양을 갖춘 문인들이 수묵과 담채로 내면의 세계를 표현하는 데 주력하였던 화풍을 말한다. 그러나 강세황의 서화에 대한 감각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공간의식의 확대, 입체감의 부각, 대각선 구도에 의한 공간감의 효율적인 표현 등으로 서양화풍의 수용에도 개방적이었다. 그리고 중국의 산수를 상상하여 그리는 관념 산수화보다는 조선의 산수를 직접 보고 그리는 진경산수를 발전시켰다. 그는 76세라는 고령의 몸을 이끌고 금강산을 직접 유람하면서 기행문과 실경사생을 남기는 열정을 보이기도 했다. 강세황은 어린 시절부터 도성 안에서 지내다가 가난 때문에 도성 밖을 벗어나 30년을 보내면서도 늘 도성 안을 그리워하며 산수화를 그리곤 하였는데, 61세에야 처음 벼슬을 하면서 다시 도성으로 되돌아올 수 있었다. 지금 필동(筆洞) 막바지의 골자기인 청학동(靑鶴洞)은 아름다운 경치 중 하나로 손꼽힌다. 강세황은 이곳에 홍엽루(紅葉樓)를 짓고 주변 경관을 화폭에 담으며 지냈으나 현재 이 건물은 남아 있지 않다.
역사정보 1713 출생 1773 관직에 첫 진출 1791 사망
시대분류 조선/1713~1791
주제분류 문화/인물/기타
지번주소
도로명주소 서울특별시 중구
지역 서울특별시 중구
시작일(발생일)
인물 1713년~179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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