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보 상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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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정보 | JGH_001033 / 남대문이 숭례문이 된 유래 | ||
* 명칭 | 남대문이 숭례문이 된 유래 | 이명칭 | |
개요 | 숭례문(崇禮門)은 조선시대 도성을 둘러싸고 있던 성곽의 정문으로서 사대문 중 남쪽에 있는 문이라 하여 남대문(南大門)으로도 불렸다. 숭례문의 현판은 가로로 쓰인 대부분의 궁궐 현판들과 달리 종서(縱書)로 쓰고 세로로 세워져 있는데 이는 풍수(風水)를 중요시한 옛 선조들이 관악산의 화기(火氣)를 누르기 위해 행한 것으로 ‘불은 불로써 다스린다(以火治火)’는 의미를 담고 있다. | ||
설명 | 숭례문(崇禮門)은 조선시대 도성을 둘러싸고 있던 성곽의 정문이다. 조선 개국 초기인 1398년 태조는 수도인 한양을 방어하기 위해 성벽을 쌓고 성곽에 네 개의 큰 문을 세웠다. 도성(都城) 사대문의 이름을 지은 사람은 조선 개국의 핵심 주역인 정도전(鄭道傳)으로 전해진다. 그는 유교(儒敎)의 오덕(五德)인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을 방위에 맞도록 배정하여 동쪽은 흥인문(興仁門, 현 동대문), 서쪽은 돈의문(敦義門), 남쪽은 숭례문(崇禮門), 북쪽은 홍지문(弘智門)이라 하였다. 각 문에는 현판(懸板)을 써서 달았는데 대부분의 궁궐 현판이 가로로 쓰인 것과는 달리, 숭례문 현판은 세로쓰기 형태로 만들어졌다. 이는 전통사상인 풍수(風水)와 관련이 있다. 조선이 한양을 도읍지로 정하면서 가장 큰 문제로 지적된 것이 화기(火氣)가 지나치다는 점이었다. 당시에는 서울의 화기가 관악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관악산은 산세가 불꽃이 타오르는 형상이라 해서 예부터 불의 산[火山], 또는 화형산(火形山)으로 불렸는데, 풍수가들은 그 기운으로 인해 서울의 화기가 세다고 주장하였다. 실제로 경복궁에 잦은 화재가 일어나자, 태조는 경복궁이 관악산과 마주보는 것을 피하고자 궁궐의 방향을 약간 틀어 앉혔다. 그리고 큰 문을 정남쪽에 세워 관악산 화기와 정면으로 대응하게 하였다. 또 문의 현판은 종서(縱書, 세로쓰기)로 쓰고 세로로 세우게 했는데 이것이 바로 숭례문이다. 원래 숭례문은 인의예지 중, 예(禮)를 숭상하는 문이라는 뜻이지만 오행으로 볼 때 예는 불[火]에 해당한다. 여기에 높인다는 뜻을 가진 숭(崇)을 함께 쓰고 수직으로 현판을 만들어 불꽃이 타오르는 듯한 형상을 만든 것이다. 장중하면서도 단아한 서체를 자랑하는 숭례문의 현판은 태종(太宗)의 큰아들 양녕대군이 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후 숭례문은 몇 차례 수리를 거치긴 했으나, 임진왜란 등 크고 작은 변란(變亂)에도 보존되었다. 그런데 2008년 2월 화재가 발생하면서 2층 누각의 90%, 1층 누각의 10% 정도가 소실되었다. 이후 숭례문은 약 5년 3개월간의 대대적인 보수 작업을 통해 복구되었고 2013년 5월 복구 기념식을 가졌다. 일제강점기 때 잘려버린 좌우측 성곽을 복구하는 등 조선시대 당시 모습에 더욱 가깝게 만들었다. 사대문 가운데 남쪽에 있는 문이라 하여 남대문(南大門)이라 불리기도 하는 숭례문은 1962년 12월 20일에 국보 제1호로 지정되었고, 문화재청 숭례문 관리소에서 관리하고 있다. | ||
역사정보 | 1398 숭례문 설치 1962 숭례문 국보 제1호 지정 2008 숭례문 화재 발생, 1·2층 누각 소실 2013 숭례문 복구 및 복구 기념식 | ||
시대분류 | 조선/1398년 이후 | ||
주제분류 | 문화/생활양식/설화 | ||
지번주소 | |||
도로명주소 | 서울특별시 중구 세종대로 40(남대문로4가 29) | ||
지역 | 서울특별시 중구 남대문로4가 | ||
시작일(발생일) | 1398년 이후 | ||
인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