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구역사문화자원Database Contents

역사문화자원

  • home >
  • 역사문화자원
  • 수정

 

정보 상세
관리정보 JGH_001029 / 상정승골의 유래
* 명칭 상정승골의 유래 이명칭 상동(尙洞)의 유래
개요 상정승골(尙政丞골)은 조선시대 명종 때 영의정을 지낸 상진(尙震, 1493~1564)의 집이 있던 곳으로, 지금의 남창동·북창동·남대문로3가·태평로2가에 걸쳐 있던 마을이다. 상동(尙洞)으로도 불리었던 상정승골은 회현동 일대에 해당한다.
설명 상정승골(尙政丞골)은 현재의 남창동·북창동·남대문로3가·태평로2가에 걸쳐 있던 마을로 조선시대 중기 영의정을 지낸 송현(松帳) 상진(尙震, 1493~1564)의 집이 있어, 상동(尙洞) 또는 상정승골이라 하였다. 상진은 어려서부터 의기가 강하고 불의를 참지 못하는 성격이었지만, 글 읽는 데는 관심을 두지 않고 말타기와 활쏘기에만 열중하였다. 15살이 넘어서야 또래들의 놀림을 받고 공부를 시작하였는데, 5달 만에 글자의 뜻을 다 깨우치고, 10개월 후에는 문장의 이치를 이해하는 데 아무런 막힘이 없었다고 한다. 1519년(중종 14)에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한 상진은 사관(史官)으로 뽑혀 교열(校閱)을 지내게 되었는데, 이때 남긴 유명한 일화가 있다. 어느 날, 시골에 내려간 상진은 촌로(村老)가 소 2마리로 밭을 가는 것을 보고, “어느 쪽 소가 더 낫습니까?”하고 물었다. 그러자 촌로는 한동안 대답을 않더니, 나중에 조용히 귓가에 속삭이는 것이었다. “어린놈이 더 낫소. 미물의 마음이란 것도 사람과 같으니 어찌 그 자리에서 당장 좋고 못함을 말할 수 있단 말이오. 자기더러 못하다고 하면 소가 언짢아하지 않겠소?”이에 상진은 촌로의 말에서 크게 깨달은 바가 있어, 평생 다른 이의 단점을 말하거나 비교하지 않았다고 한다. 상진은 1548년(명종 3)에 우의정에 오른 후 좌의정과 영의정을 두루 역임하였는데, 그의 청렴결백과 넓은 도량 때문에 두터운 신망을 받았다. 사람들은 상진의 업적과 인품을 두고 세종 때의 황희(黃喜) 다음으로 꼽을 정도였다. 1564년(명종 19) 상진이 세상을 떠나자, 명종(明宗)은 상진의 죽음을 애도하는 시를 짓고, 후일 상진의 묘에 업적을 기리는 신도비를 세웠다. 상진이 살았던 마을은 조선말까지 상정승골 또는 상동이라 불리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영조(英祖)도 이곳을 지날 때면 몸을 굽혀 경의를 표했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역사정보
시대분류 조선/1493년 이후
주제분류 문화/생활양식/설화
지번주소
도로명주소 서울특별시 중구
지역 서울특별시 중구
시작일(발생일) 1493년 이후
인물

 li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