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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상세
관리정보 JGH_001027 / 영미교의 유래
* 명칭 영미교의 유래 이명칭
개요 영미교(永美橋)는 서울특별시 중구 황학동(黃鶴洞)과 종로구 숭인동(崇仁洞) 사이 청계천에 있던 다리이다. 조선시대 초기에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되며, 다양한 이칭(異稱)이 존재한다. 그중 영미교라는 이름은 단종(端宗) 폐위와 관련한 것으로, 단종과 정순왕후(定順王后)가 이 다리에서 영영 이별하였다고 하여 영이별교(永離別橋)에서 영미교로 변음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설명 영미교(永美橋)는 지금의 황학동 162번지에 해당하는 곳에 있던 다리로, 청계천7가와 8가 중간, 황학동(黃鶴洞)에서 숭인동(崇仁洞) 숭신초등학교와 동묘로 나가는 교차로에 놓여 있던 나무다리이다. 이 다리는 조선시대 초기에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되며, 처음에는 왕심평대교(旺尋坪大橋)라고 불렀다. 1458년(세조 4) 단종(端宗)이 폐위된 후 강원도 영월로 귀양 갈 때, 정순왕후(定順王后) 송비(宋妃)가 이 다리까지 따라와 배웅하였다고 한다. 단종과 이별한 송비는, 숭인동의 암자에 머물면서 매일 동망봉(東望峰)에 올라 영월을 바라보며 단종의 평안을 빌었다. 이 이별 후 두 사람이 영영 만나지 못하여, 그 뒤로 이 다리를 영이별교(永離別橋)·영영건넌다리·영이별다리 등으로 불렀다 한다. 후일에 이 다리의 이름이 된 영미교(永尾橋)는 영이별교가 변음(變音)된 데서 유래한 것이라는 설이 있으며, 영미동(永尾洞)에서 내려오는 개천 끝에 놓인 다리라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한다. 또 창신동에 있던 영미사(永尾寺) 승려들이 다리를 놓았기 때문에 영미교(永尾橋) 혹은 영미다리라고 불렀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후 성종(成宗) 때 다리를 보수하면서, 성종이 직접 영도교(永度橋)라는 어필(御筆)을 내렸다는 기록이 있다. 영도교는 서울 동대문을 거쳐 왕십리나 광나루로 나가기 위해서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곳이었으므로 조선시대 말까지 서울 외곽의 주요 교통로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이 이 다리의 돌로 경복궁(景福宮)을 중건할 때 석재로 사용하면서 없어졌다. 대신 같은 자리에 나무다리를 놓았는데, 홍수 때마다 떠내려가곤 하였다 한다. 그래서 사람들이 개천에 띄엄띄엄 징검다리를 놓아 건너다녔는데, 이로 인해 한때는 띄엄다리로 불리기도 하였다. 후에 콘크리트로 만든 다리가 놓이기도 했지만, 1950년대 말의 청계천 복개공사로 없어졌다. 지금은 영미교가 있던 위치만 확인할 수 있을 뿐, 다리의 구조나 형태 등은 알 수 없다. 지금 가설된 다리는 2005년 청계천복원사업의 일환으로 놓인 것이다.
역사정보 조선 초기(추정) 영미교 준설
시대분류 조선/미상
주제분류 문화/생활양식/설화
지번주소
도로명주소 서울특별시 중구 황학동
지역 서울특별시 중구 황학동
시작일(발생일) 미상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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