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구역사문화자원Database Contents

역사문화자원

  • home >
  • 역사문화자원
  • 수정

 

정보 상세
관리정보 JGH_001021 / 무학대사 이야기2
* 명칭 무학대사 이야기2 이명칭
개요 무학대사(無學大師, 1327~1405) 이야기는 태조(太祖)의 왕사(王師, 임금의 스승 역할을 하였던 승려)였던 무학대사와 한양도성(漢陽都城)의 축조에 얽혀 전해 내려오는 구전설화이다. 이 이야기는 ‘서울’의 지명 유래로 전해지기도 한다.
설명 무학대사(無學大師, 1327~1405)의 법명은 자초(自超), 성은 박(朴)씨이며 호는 무학(無學), 당호(幢號)는 계월헌(溪月軒)이다. 경상남도 합천군(陝川郡) 삼가면에서 출생하여, 1344년에 출가해 소지선사(小止禪師)의 제자로 승려가 되고, 혜명국사(慧明國師)에게서 불법을 배웠다. 1353년(공민왕 2) 원(元)나라 연경(燕京)에서 유학했으며, 1356년 귀국하여 1373년에 왕사(王師, 임금의 스승 역할을 하였던 승려)가 된 혜근의 법을 이어받았다. 고려 말 퇴락하는 불교를 비판하였고, 이성계를 만나 그가 새로운 왕이 될 것이라 예견했다. 1392년 조선이 개국하자 태조(太祖)의 왕사가 되었다. 한양(漢陽)을 새 도읍지로 정한 태조는 속히 도성을 쌓고 궁궐을 짓고자 하였다. 무학대사는 태조에게 “북쪽으로는 삼각산 중바위(인수봉) 밖으로 도성을 축성(築城)해야 나라가 평안하고 흥(興)할 것입니다”라고 아뢰었다. 그러나 조정대신들은 인수봉 안으로 성을 쌓아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하였다. 도성 축성에 관한 논쟁은 날이 갈수록 심각해졌는데 그도 그럴 것이 무학은 인수봉 안으로 성을 쌓으면 중바위가 성안을 넘겨다보는 형국이므로 불교가 결코 흥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반면 조정대신들은 인수봉 안으로 성을 쌓아야 유교가 흥할 수 있다는 지론이었기에 무학의 의견에 맞섰던 것이다. 태조는 일등 개국공신들과 왕사 무학의 의견 사이에서 크게 갈등하다가 하늘에 제사를 지내 결정하기로 했다. 제사를 지낸 이튿날 밤새 내린 눈이 봄볕에 녹았는데 인수봉 안쪽에 마치 선을 그어 놓은 듯 눈이 녹지 않은 부분이 있었다. 조정의 대신들이 이 같은 사실을 고하며 하늘의 뜻이므로 도성을 인수봉 안으로 쌓아야 한다고 주장하자, 태조는 눈이 남긴 선대로 성을 쌓을 것을 명하였다. 이를 두고 눈이 울타리를 만들었다고 하여 한자로 눈이라는 뜻의 설(雪)과 빙 둘러싼다는 울타리라는 뜻의 울(圍)을 써서 ‘설울’이란 말이 생겼고, 점차 발음이 변하여 ‘서울’로 불리게 됐다는 설이 함께 전해진다.
역사정보
시대분류 미상/미상
주제분류 문화/생활양식/설화
지번주소
도로명주소 서울특별시 중구
지역 서울특별시 중구
시작일(발생일) 미상
인물

 li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