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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상세
관리정보 JGH_001003 / 장님 부인
* 명칭 장님 부인 이명칭
개요 장님 부인 설화는 서해(徐嶰)의 아내이자 서성(徐渻)의 어머니인 고성(固城) 이씨에 관한 일화로, 지금의 중림동인 옛 약현(藥峴)에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이다. 맹인인 이씨 부인은 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를 실행해 자식을 훌륭하게 키워낸 것은 물론, 가문을 조선의 대표적인 명문가로 이끌어 사후 정경부인으로 추증된 인물이다.
설명 장님 부인 설화는 신사임당(申師任堂), 장계향(張桂香) 등과 함께 조선의 3대 현모로 불리는 고성(固城) 이씨에 관한 이야기로, 지금의 중림동인 옛 약현(藥峴)에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이다. 약현은 서울역에서 만리재 쪽으로 이어지는 중림동의 옛 이름이다. 1550년대 약현에는 고성 이씨가 살았는데, 이곳에 그녀와 관련된 일화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 예조참의 서고(徐固)의 아들 서해(徐嶰)는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가난하게 자랐지만, 어려서부터 문장과 학식이 뛰어났다. 성년이 된 그는 스승 퇴계 이황의 소개로 고성 이씨 집안과 혼사를 맺게 되었는데, 안동의 신부 집으로 가던 도중, 결혼할 아내가 장님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신랑 일행은 즉시 파혼하고 돌아가자며 흥분하였다. 그러나 서해는 자신이 이곳까지 왔다가 혼례를 하지 않고 돌아간다면, 소문이 퍼져 신부는 영원히 결혼할 수 없을 것이라며 혼인을 강행했다. 서해는 장님 신부를 자신의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아끼고 사랑하여 아들 서성(徐渻)을 얻었지만, 이 행복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23살의 젊은 나이에 서해가 세상을 떠나버린 것이다. 과부가 된 이씨는 남편을 잃은 슬픔이 채 가시기도 전에 3살 난 어린 아들과 함께 생계를 걱정해야 했다. 이씨 부인은 서성을 잘 키우는 것만이 요절한 남편에 대한 도리라고 생각하여, 자식에게 좋은 교육환경을 만들어주기 위해, 살고 있던 안동에서 한양으로 이사했다. 그리고 현 약현성당 자리에 집을 지은 뒤, 청주를 빚고 찰밥과 유밀과를 만들어 팔며 생계를 꾸렸는데, 질과 맛이 뛰어나 장안의 명물이 되었고, 큰돈을 모으게 되었다. 지금의 약주(藥酒)와 약식(藥食), 약과(藥果)라는 명칭은 모두 이씨 부인으로부터 유래했다고 전해지는데, 임금이 맛을 보고 천하의 진미로다 하며 약주라 이름 지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또 만든 곳이 약현이라 ‘약’자를 썼다고도 하며, 아들 서성의 호가 약봉(藥峰)이라 여기에서 유래된 것이라는 추측도 있다. 이씨 부인은 사물의 이치에도 밝았다. 약현에 집을 짓던 중, 앞 못 보는 부인이 깐깐하게 감독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긴 목수가 대청의 기둥을 거꾸로 세웠다. 그러자 이를 손으로 하나하나 만져보고, 목수를 야단쳐서 다시는 속이지 못하게 하였다고 한다. 이런 어머니 덕분에 서성은 율곡 이이(李珥)의 문하생이 되어 29세에 문과에 급제했고 임진왜란 때 크게 활약하는 등 당대의 인재로 평판을 얻었다. 이후 광해군(光海君)의 패륜을 반대하여 오랜 귀양살이를 했지만, 인조반정 후에 다시 복직되어 병조판서를 지냈다. 서성의 아들과 자손들도 6정승과 3제학을 하는 등 명문 일가를 이뤘다. 비록 맹인이었으나 재색과 학덕을 갖췄던 이씨 부인은 사후 정경부인으로 추증되었다.
역사정보
시대분류 조선/1537년 이후
주제분류 문화/생활양식/설화
지번주소
도로명주소 서울특별시 중구 중림동
지역 서울특별시 중구 중림동
시작일(발생일) 1537년 이후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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