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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상세
관리정보 JGH_000998 / 남소문의 유래담
* 명칭 남소문의 유래담 이명칭
개요 남소문 유래담은 조선시대 장충동에서 한남동으로 넘어가는 고갯길에 있던 남소문(南小門)에 얽힌 이야기이다. 남소문은 조선시대에 교통의 편의를 위해 세워졌으나 문을 열어 놓으면 도성 안 여자들의 음행이 늘어나고, 풍기가 문란해진다는 속설에 의해 폐쇄되고 말았다.
설명 남소문(南小門)은 장충동에서 한남동으로 넘어가는 버티고개에 있었던 성문으로, 한양의 4소문 가운데 하나였다. 남소문은 조선 초기인 1457년(세조 3)에 세워졌다. 당시 도성에서 한남동의 한강나루를 통해 남쪽으로 가려면 먼 거리의 광희문(光熙門)을 지나야 해서 불편했다. 이에 곧장 한강나루로 나갈 수 있는 성문을 설치하자는 건의에 따라 새로 건립된 것이 버티고개의 남소문이었다. 그러나 남소문은 설치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예종(睿宗) 때 폐쇄되고 말았다. 지경연사(知經筵事) 임원준(任元濬) 등이 수레조차 다닐 수 없어 실용성이 없다고 주장하는 한편, 음양가(陰陽家)들이 풍수사상을 들어 개방을 반대했기 때문이다. 음양가들에 따르면, 서울의 남동쪽을 개방하게 되면 도성 안 여자들의 음행(淫行)이 많아져 화가 미친다는 것이다. 그런 이유에서인지는 몰라도 성문을 건축한 직후에 세조의 장남 의경세자가 세상을 떠나기도 했기에 예종은 성문의 폐쇄 건의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이후로도 1554년(명종 9) 폐쇄된 남소문 부근에 도적들이 숨어들었다가 밤이 되면 성벽을 넘어 도둑질을 하는 통에 광희문 밖 일대가 도둑의 소굴이 되어 사람이나 말이 통행하지 못하는 일이 잦았다. 그러자 남소문을 열어 피해를 줄이자는 주장들이 나오기 시작했고, 명종과 숙종(肅宗) 때에도 문을 개통하자는 의견이 여러 차례 건의되었다. 하지만 결국 음양가들의 반대에 부딪혀 남소문의 개통은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남산의 형상이 어찌 보면 부인이 어린애를 낳는 형상으로 보이는데, 애 낳는 형태의 문이 남소문이므로 문을 열면 도성 안 여자의 풍기가 문란해진다고 하여 끝내 닫아놓고 지내게 되었다. 이에 조선말까지 남소문의 역할은 광희문이 담당하였다. 조신시대에 풍수사상이 얼마나 강하게 작용하였는지를 알려주는 예이다. 남소문은 비록 폐쇄되기는 하였으나 조선말까지 존속하였을 것으로 추측되는데, 언제 훼손되고 허물어졌는지 정확한 시기를 알 수 없다. 일제강점기에 이르러서는 남소문의 주춧돌마저 없어졌다.
역사정보 1457 남소문 건립
시대분류 조선/미상
주제분류 문화/생활양식/설화
지번주소
도로명주소 서울특별시 중구
지역 서울특별시 중구
시작일(발생일) 미상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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