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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상세
관리정보 JGH_000994 / 활쏘기
* 명칭 활쏘기 이명칭
개요 활쏘기는 활과 화살을 사용하여 표적을 맞히는 우리 민족의 전통 놀이이다. 주로 사대부가를 중심으로 무술 또는 놀이로서 광범위하게 전승되었다. 우리 민족은 삼국시대부터 활쏘기를 즐겼다는 문헌 기록이 남아 있다. 현재는 서양에서 전해진 양궁과 함께 스포츠의 한 종목이기도 하다.
설명 활쏘기는 사대부가를 중심으로 하여 기품 있는 무술 또는 놀이로서 광범위하게 전승되었다. 사대부들은 심신을 단련하고 덕행을 수양하고자 활쏘기를 ‘사예(射藝)’라고 하여 반드시 익혀야 할 무예의 하나로 여겼다. 그리하여 일상을 벗어나 활쏘기로 사냥을 즐기기도 하고, ‘향사례(鄕射禮)’라는 활쏘기 의식을 통해서 사대부 간의 친목을 도모했다. 궁사(弓士)들은 음력 3월경의 청명한 날을 택해 활쏘기 경기를 실시했다. 구경꾼들이 몰린 가운데 궁사들이 번갈아 활을 쏘면, 화려한 옷을 입은 기생들이 뒤에 줄지어 서서 소리를 하며 격려하였다. 화살이 과녁을 맞히면 노래와 춤으로 여흥을 돋우었으며, 주연을 베풀기도 하였다. 조선시대 백성들도 남산의 석호정(石虎亭)에서 활쏘기를 즐겼다고 한다. 이처럼 우리나라에서 활은 가장 중요한 무기 중 하나였으며, 활쏘기는 민중에 가장 널리 보급되었던 무예였다. 우리 활에 관한 가장 오랜 기록은 중국의 《삼국지(三國志)》에 “예(濊)의 창은 길이가 세 발(丈)이나 되어 여럿이 들어야 하며 (중략) 낙랑단궁(樂浪檀弓)도 있다”는 내용이다. 여기서 낙랑단궁은 각궁의 원조로, 부여 등 여러 나라에서 사용했다. 또한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따르면 백제에서는 320년(비류왕 17) 궁궐 서편에 사대(射臺)를 설치하고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활쏘기를 하였으며, 당시의 명궁이던 고이왕은 하루에 40마리의 사슴과 한 번에 2마리의 기러기를 맞히는 솜씨를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신라에서는 788년(원성왕 4) 이전까지는 활쏘기에 의해서만 인재를 선발하였으며, 팔월한가위에는 궁술대회를 개최하여 신하들과 활쏘기놀이를 즐겼고, 이를 통해 능력 있는 자를 발굴해서 적재적소에 배치했다. 신라가 궁술을 매우 중히 여겼음을 알 수 있다. 고려시대 현종은 신하들이 공무를 쉬는 날이면 교외에서 활을 쏘게 하였고, 선종은 활터인 사장(射場)을 따로 설치하여 궁술을 익히게 하되, 과녁을 맞히는 자가 있으면 상을 베풀었다.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는 태조(太祖) 이래 역대의 왕들이 활쏘기를 즐겨 이를 장려했기 때문에 문과 출신의 문신들도 활을 잘 쏘았으며, 궁술대회도 자주 열었다. 이후 활쏘기는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다소 위축되는 경향을 보였으나, 1922년 황학정이 중건되고 조선궁도연구회(朝鮮弓道硏究會)가 발족됨에 따라 점차 활기를 찾게 되었다. 오늘날에는 서양에서 전해진 양궁과 함께 대중의 인기를 끄는 스포츠 종목으로 발달하게 되었다.
역사정보
시대분류 미상/미상
주제분류 문화/행사/풍물놀이
지번주소
도로명주소 서울특별시 중구
지역 서울특별시 중구
시작일(발생일) 미상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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