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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상세
관리정보 JGH_000094 / 회현동한옥
* 명칭 회현동한옥 이명칭
개요 회현동한옥(會賢洞韓屋)은 근대기의 한옥이 주거건축으로 남촌(南村)에 남아있는 희귀한 사례이다. 남촌이라면 보통 청계천 이남 지역을 가리키는 것으로 고려되고, 가난한 선비들이 주로 살았다고 알려져 있으나 조선시대에는 세력가들의 주거(住居)와 누정(樓亭)들이 즐비해 있는 곳이었다. 회현동한옥이 위치한 퇴계로12길 일대는 고층 건물들이 즐비하게 늘어선 가운데, 아직 낮은 층수의 근대건축물들이 상당수 남아 있는 곳이다.
설명 회현동한옥(會賢洞韓屋)은 근대기의 한옥이 주거건축으로 남촌(南村)에 남아 있는 보기 드문 사례이다. 남촌이라면 보통 청계천 이남 지역을 가리키는 것으로 고려되고, 가난한 선비들이 주로 살았다고 알려져 있으나 조선시대에는 세력가들의 주거(住居)와 누정(樓亭)들이 즐비해 있는 곳이었다. 개화기 무렵부터는 일본인들의 거류지로 발전하기도 했다. 구(舊) 회현동 일대는 경치가 수려한 남산 자락에 위치하여 조선시대 많은 양반들이 거처하였고, 누각과 정자를 지어 풍경을 즐기고 교유를 나누던 곳이다. 회현동한옥이 남아 있는 중구 퇴계로12길 일대는 이웃한 예장동과 함께 남촌으로 불리었다. 남촌이란 조선말부터 만들어져 점차 확장된 일본인 거주지를 의미하는데, 한국인들이 모여 살던 북촌(北村)에 대응하는 지역명으로 ‘청계천 남쪽’을 뜻하는 말이었다. 원래 남촌에는 일부 권문세가들도 살기도 하였으나 벼슬을 하지 못한 가난한 선비들이 주로 살고 있었다. ‘남산골 샌님’이란 말의 유래가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또한 지방에서 한양으로 진출한 사림세력들이 주로 터를 잡은 곳도 남촌이었다. 1876년 개항 후 일본인들의 성안에 들어와 사는 것은 허용되지 않다가 1885년에야 일본인의 서울 입경과 거주가 정식으로 허가되었다. 일본인 거류지역은 남산 기슭 녹천정(綠泉亭)이 있던 곳, 즉 일본공사관 인근의 중구 예장동과 주자동, 충무로1가에 이르는 진고개[泥峴] 일대로 한정되었다. 그러나 서울에 거주하는 일본인 인구는 빠르게 늘었고, 이에 따라 일본인 거류지도 점차 확대되었다. 1896년(고종 33)에 일본공사관은 지금의 충무로1가 입구로 확장해 옮겨갔고, 일본인 거류지의 중심지도 외진 남산 밑에서 번잡한 도심으로 옮겨갔다. 남촌은 회현동 동부까지 확대되었는데, 이는 단순한 일본인 거류지의 확장이 아니라 신시가지 혹은 신도시가 확장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1910년 당시 일본인은 서울 인구의 14%를 차지할 만큼 급격한 증가를 보였는데, 그들 대부분은 남촌에 살고 있었다. 따라서 남촌은 일제강점기 식민지 지배층이 사는 특권적 공간으로 위상이 바뀌었다. 회현동한옥이 위치한 퇴계로12길 일대는 고층 건물들이 즐비하지만, 아직도 낮은 층수의 근대건축들이 상당수 존재한다. 그러나 주로 1960년대 이후 건축물들이고, 여타 남촌 지역의 근대적 주거건축은 주로 문화주택들이다. 따라서 근대적 주택과 현대적 주택이 공존하는 곳에서 전근대적 주거건축으로서 남은 회현동한옥은 희귀한 존재라 하겠다.
역사정보
시대분류 조선/미상
주제분류 문화/축조물/고가옥, 관아건축
지번주소
도로명주소 서울특별시 중구 퇴계로12길 39-26(회현동1가 45-2)
지역 서울특별시 중구 회현동1가
시작일(발생일) 미상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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