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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상세
관리정보 JGH_000949 / 을지로6가
* 명칭 을지로6가 이명칭
개요 을지로6가(乙支路六街)는 동대문역사문화공원과 훈련원공원 사이에, 국립의료원을 중심으로 넓게 위치한다. 을지로6가의 동명은 이곳이 일제강점기에 황금정6정목(黃金町六丁目)으로 불리던 것을 1946년 10월 1일 일제식 동명을 우리말로 바꾸면서 고구려의 명장 을지문덕(乙支文德)의 성을 따서 을지로6가로 개칭된 것이다. 평화시장·두산타워·밀리오레·헬로우에이피엠· 굿모닝시티 등이 있다.
설명 동대문역사문화공원과 훈련원공원 사이에, 국립의료원을 중심으로 넓게 자리잡고 있는 을지로6가(乙支路六街)는 조선시대 초기 한성부 남부 명철방(明哲坊)에 속했던 곳으로 일제강점기 황금정6정목(黃金町六丁目)으로 불리다가 1946년 10월 1일 일제식 동명을 우리말로 바꾸면서 을지로6가로 되었다. 을지로의 동명은 세종로·충무로 등과 같이 대한민국의 역사적인 위인 가운데 한 분인 고구려의 명장 을지문덕(乙支文德)의 성(姓)을 따온 것이다. 1914년 지금의 을지로입구에 해당되는 부근을 구리개(을지로1가와 을지로2가 사이에 있던 고개) 또는 동현(銅峴)이라 불렀는데 이 뜻을 연유로 한자로 다시 옮긴 것이 황금정6정목이었고 1946년에 을지로6가로 개칭되었다. 현재 국립의료원이 위치한 지역은 조선 초기 태조 때부터 1894년(고종 31)까지 무관을 뽑는 과시(科試)를 시행하고 군사들의 무술훈련 및 병서(兵書), 전진(戰陣) 등의 강습을 맡아오던 훈련원(訓練院)이 있었다. 그래서 이곳 일대를 훈련원동으로도 불렀다. 대한제국 때 일본이 정미(丁未) 7조약을 강제로 체결한 뒤 한국군을 강제로 해산시킨 장소도 바로 훈련원이었다. 일본은 1907년 8월 1일 훈련원에서 한국군해산을 강행하였다. 이 사실을 알고 있던 시위대대 제1대대 박승환(朴昇煥) 대대장이 한국군 해산을 반대하기 위해 자결하자 이를 계기로 훈련원에서 강제로 무장해제 당한 한국군인들은 남대문 부근으로 진출하여 일본군을 상대로 무력으로 저항했다. 이 사건은 이후 본격적인 무장항일투쟁의 시발점이 되었다. 예전에 을지로5가·을지로6가·방산동에 걸쳐 있는 지역을 연방동으로 불렀는데 이는 그곳에 연꽃이 자생하고 있는데서 그 명칭이 유래되었다. 원래 연밥이 크고 굵기로 유명해서 연밥동이라고 부르던 것이 변해서 연방동이라 하였다. 이곳의 연밥을 먹으면 피부가 하얗게 되고 윤기가 돈다하여 부녀자들이 앞을 다투어 찾았다고 한다. 을지로6가 북쪽 청계천에는 5칸의 홍예문으로 축조한 석교인 오간수(五間水)다리·오간수문(五間水門)이 있었다. 이 수문은 1907년(광무 11) 경성부 토목국장 유맹(劉猛)이 청계천 물의 유속(流速)에 저해 요소가 된다하여 헐어 버렸다. 이 수문 바로 남쪽에는 오간수문을 축소시킨 이간수문(二間水門)이 있었으나 이 역시 일제강점기에 철거되었다. 조선시대에 을지로6가 북쪽 청계천 부근에는 중인 이하의 사람들이 주로 모여 살던 곳이었다. 1957년 광교 방면부터 청계천이 복개되기 시작하여 을지로6가를 지나 마장동까지 복개공사가 완료된 후, 그 노변으로 의류전문시장인 평화시장상가가 신축되어 을지로6가는 상업지역으로 변신하게 되었다. 현재 이곳은 평화시장을 비롯하여 두산타워·밀리오레·헬로우에이피엠·굿모닝시티 등이 자리잡고 있어 전통 재래시장과 현대식 쇼핑몰이 혼재된 대단위의 쇼핑타운을 이루고 있다.
역사정보 조선 초기 한성부 남부 명철방(明哲坊)에 속함 일제강점기 황금정6정목(黃金町六丁目) 1946 을지로6가 동명제정
시대분류 현대/1946(동명제정)
주제분류 문화/생활양식/기타
지번주소
도로명주소 서울특별시 중구 을지로6가
지역 서울특별시 중구 을지로6가
시작일(발생일) 1946년(동명제정)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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